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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년] 그 방에 고양이가 없더라도

계간년른 가을호 참여

구남친을 회사 사무실에서 다시 만난다는 게 딱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것도, 3년이나 씨씨로 지내고 서로의 처음을 나누어 가진 사이라면 더더욱. 여긴 마케팅 본부 소속 옹 대리, 우리 회사 자랑이죠. 여긴 이번 특채로 입사한 황민현 대리입니다. 새로 꾸려진 국제 마케팅팀 파트로 배속될 거예요. 김 부장이 신난 얼굴로 민현을 소개했고, 성우는 종이컵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에 같은 학교더라고. 김 부장은 굳이 알 것 없는 tmi적 정보까지 쏟아냈다. 성우 씨도 A대 경영학부 동문이던데, 둘이 만난 적 없어요? 성우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학부 인원이 이백 명에 가까웠는데요. 그렇죠, 민현 씨? 성우가 눈웃음을 흘리며 묻자, 민현도 말간 얼굴로 화답했다.


“네, 저희 초면인 것 같아요.”


초면. 성우에겐 그 단어가 참으로 재미났다. 요즘은 혀도 빨고 좆도 빨아준 사이를 ‘초면’이라고 부르나. 황민현의 어휘 선택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성우 역시 민현과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남자와 연애했다는 사실을 굳이 뭐, 게다가 그 구남친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사실까진 더더욱 굳이. 성우는 그럴듯하게 침묵했고, 대신 민현의 어깨를 부러 세게 두드려주었다. 이렇게라도 인연이 닿으니 너무 좋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황민현 씨. 민현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에, 성우는 조금 통쾌해졌다.


모든 이별은 흑역사로 남는 법이지만, 성우에게 민현과의 연애는 조금 더 아찔한 흑역사였다. 헤어진 지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종종 성우는 민현의 꿈을 꿨다. 꿈속 황민현은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사월의 봄, 손님이 별로 없던 동네 카페 구석진 자리였다. 민현은 가죽 배낭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성우에게 들이밀었다. 성우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서류 내용을 훑었다. 대학원 입학 허가 서류였다. 당시 민현은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 중이었고, 가장 잘나가는 학교가 아니면 지원조차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민현이 합격 서류를 받았다는 건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성우는 기쁘게 웃었다. 와, 민현아 축하해! 여기 1지망 학교잖아. 우리 곱창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신이 난 성우는 속살거리면서 민현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런 성우를 바라보며 민현도 나긋하게 웃었다.


고마워, 성우야.


그다음 민현이 무어라 대답했더라. 헤어져달라고 했나, 혹은 합리적으로 판단해보면 헤어짐이 답이라고 했나. 황민현은 대학원 입학 서류를 꺼내놓고 빠르게 이별을 고했다. 성우는 그 장면에서 늘 아침을 맞이했다. 이불을 걷어차며 옹성우는 소리쳤다. 악, 황미녀언! 성우도 민현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롱디는 어려운 것이니까. 그래도 삼 년을 사귄 관계였다. 서로의 대학 캠퍼스 시절 대부분을 공유한 사이. 유학을 목전에 뒀다고 삼 분 만에 정리될 관계는 아니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온라인으로 하나 되는 글로벌 지구인이잖아. 조금 정도는, 노력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러나 그 마음은 성우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민현은 빠르게 성우를 설득했다. 성우야, 나도 너를 사랑하지만. 장거리 연애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 지금 헤어지는 게 서로 합리적인 거 같아. ‘합리적’이라는 단어에 성우는 반론을 포기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무엇을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성우는 패잔병처럼 헤어짐에 순종했다. 남은 것은 ‘황민현 개새끼. 합리성으로 연애하냐’ 같은 욕설뿐이었다.


황민현이 출국하던 날, 성우는 공항 근처 호텔을 잡아 혼자 술을 마셨다. 맥주와 소주를 한 아름 짊어지고 호캉스를 즐겼다. 술에 취해 문자며 카톡이며 전화며 민현에게 온갖 쌉소리를 퍼부었다. 너가 그렇게 가면 잘 먹고 잘살 줄 아냐는 둥, 니가 나보다 잘생긴 남자 만날 수 있을 것 같냐는 둥. 저주 같지 않은 저주를 빠르게 전송하면서 성우는 조금 울었다. 울면서 소주 두 병을 비우자 속 안이 뒤집어지듯 요동쳤고, 성우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반복했다. 시큼하고 먹먹한 기분이었다.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내면 민현이 남겨놓은 감정도 사라질 것처럼. 카톡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우야, 잘 지내. 건강해야 해. 언제나 행운을 빌어. 마지막까지 좆같은 답변이었다. 옹성우는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하얀 침대 시트 속에 감겨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끝나 있었고, 성우는 체크아웃했다.


그렇게 끝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볼 일 없는 구남친이라고 믿었는데. 사무실에서 마주한 민현의 얼굴은, 스물하나 둘의 그때처럼 말갛고 태연했다. 성우는 기가 찼다. 그리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쟤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나. 오후 업무를 망쳐버린 성우는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창이나 뒤적거렸고, 김 인턴이 커피를 사 들고 다가와 빠르게 말을 붙였다. 대리님, 새로 입사하신 분 진짜 잘생겼어요. 아, 물론 대리님만큼은 아니지만. 허둥지둥하는 인턴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면서 성우는 그저 웃었다. 그래, 잘생겼지. 잘생겼어.


애초에 잘생긴 거 하나에 심취해 제대로 털어내지도 못한 관계였다.




/





같은 마케팅 부서였지만 본부 소속인 성우와, 신생팀 소속인 민현이 마주칠 일은 드물었다. 민현은 영문 서류 작업이나 해외 시장 연구 따위를 위해 뽑힌 경력직이라고 했다. 연구직에 가까운 자리였다. 유학을 괜히 갔던 건 아니구나. 특채에 연구직 계열은 쉬운 자리가 아니었고 그만큼 연봉과 안전성도 보장받았다. 공부 열심히 했네, 민현이. 성우는 문득 민현을 기특해했다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성우는 다시 이성을 다잡았다. 차라리 다행이다. 연구 계열 직무라니. 일의 결이 다르니, 마주칠 일도 적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사무실보다 다른 공간에서 더 자주 일어났다. 지하주차장에서 황민현은 굳이 성우 차 근처에 주차했고, 성우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황급히 다가와 닫히는 문 사이에 발을 밀어 넣었다. 종종 구내식당에서 마주치면 민현은 성우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혹시, 점심 같이하실래요? 성우는 주변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의문 쩍은 눈길로 민현을 바라보았다.


“저랑요?”

“네, 옹 대리님하고요.”

“황 대리님은 팀원들하고 드셔야죠.”

“저희 팀은, 각자 먹는 문화인 것 같아요.”


신생팀이니 팀장님도 젊으시고. 민현이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고 성우는 ‘아, 그러시구나’라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알 게 무엇인가. 민현의 팀이 해외 대학 출신 개인주의자 모임이건 아니건, 황민현과 옹성우가 밥을 먹는 일은 없어야 했다. 구남친과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18% 정도밖에 없을 거라고(근거는 없지만). 그리고 옹성우는 그 18%에 속하지 않는 주류 집단이었다. 성우는 유쾌하게 화답했다. 전 이미 팀원들과 점심 먹었습니다. 황 대리님 식사 맛있게 드시고요. 성우는 민현에게 돌아서면서 이를 갈았다. 덕분에 밥도 못 먹고, 이게 뭐람. 


예나 지금이나 애매하게 솔직하고 애매하게 비밀이 많은 타입이었다. 황민현은 친구였을 때 차라리 파악하기 쉬웠다. 친구였을 때는 제 심정도 곧잘 솔직하게 고백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연인이 되었을 때부터 민현은 숨기는 것이 많아졌다. 과제하기 싫다거나, 모 교수님이 사담이 많아 재밌다거나 이런 부분은 여전히 솔직했지만. 성우가 진짜로 알아야 하는 사항들에 대해 민현은 접근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면, 대학 졸업 학기 무렵 민현이 응급실에 실려 갔던 사건이 꼭 그러했다. 그날은 성우가 길가에서 새끼 고양이를 주워온 날이었다. 처음에는 어미와 잠시 헤어진 새끼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며칠을 내버려 두어도 고양이는 캠퍼스 잔디밭 구석진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결국 비가 오던 날 성우는 고양이를 안고 민현의 집으로 들어섰다. 민현의 자취방이 성우의 본가보다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두 사람은 검색을 거듭해서 고양이 분유가 따로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동물병원에 다녀오고 분유를 먹이는 정도야 해줄 수 있었지만. 새끼고양이를 맡길 곳이 없어 두 사람은 함께 발을 동동 굴렀다. 민현은 고민하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선언이었다. 성우는 안심했고 그것으로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한 며칠 뒤부터 민현의 두 눈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너 왜 그래? 성우가 깜짝 놀라 묻자 민현은 ‘나 사실 고양이 털 알레르기 있어’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성우는 민현을 등에 업고 근처 병원으로 달려갔고, 몇 가지 급성 약품을 투여받은 후에야 민현의 두드러기는 잠잠해졌다. 동물 털 알레르기로 이 정도까지 되는 일은 정말 드문데 말이죠. 평소 증상이 심한 타입인가요? 의사가 펜 끝을 씹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행히 모든 경위를 살펴본 동기 하나가 고양이를 입양해주기로 했지만, 성우는 기분이 이상했다. 왜 민현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고양이 털 알레르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을까. 왜 옹성우는 황민현과 연애 중인데도 그의 알레르기 사실 하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까.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민현이 답했다.


그냥 너한테, 걱정 끼치기 싫었어.


성우는 책망하듯 얼굴을 구겼다.


민현아, 이건 내가 알았어야 하는 문제잖아.


민현과의 연애사는 늘 그런 종류의 흐름 속에 있었다. 걱정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중요한 것들은 털어놓지 않으면서, 정작 오만 걱정은 황민현이 다 끼쳤다. 곁에 있을 땐 딴소리만 했다. 황민현은 말만 해. 성우의 오랜 입버릇이었다. 민현은 성우에게 정말로 많은 말들을 남겼다. 대부분 옹성우를 사랑한다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성우는 잘생겼다거나, 성우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즐겁다거나. 그래서 성우는 때때로 민현이 아쉽고 서운하면서도 모든 것을 넘어갈 수 있었다. 저것도 민현만의 사랑 표현 방식이겠거니 존중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사랑받는다는 확신은 있었으니까. 성우는 민현이 자신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꿈꾸고 있다고 믿었다. 민현의 유학 직전 결국, 아닌 걸로 밝혀졌지만.


성우가 담배를 피우고 제 자리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는 커피 한 잔이 놓여있었다. 성우가 좋아하는 달달한 종류의 커피였다. 김 인턴이 아는 척을 했다. 황 대리님이 두고 가셨어요. 오늘 황 대리님이 입사 기념 커피 턱 내신다고, 저희 부서까지 돌리셨어요. 황 대리님 부자신가 봐요. 김 인턴은 신나 보였고 성우는 가만히 커피를 바라보았다. 커피를 마시려는데 홀더 쪽에서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이 떨어졌다. [베이글, 컴퓨터 받침대 아래쪽에] 김 인턴도 김 부장도 받지 못한, 베이글 하나가 컴퓨터 받침대 아래 살며시 숨어있었다. 한숨이 목구멍에 걸려 덜컥거렸다. 황민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우가 점심을 거르고, 자신을 피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혼자 판단했겠지. 점심을 거르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베이글까지 돌리기는 애매하니까, 몰래 이렇게. 성우는 베이글 앞에서 머물렀을 민현의 손끝을 상상했다. 성우는 그 모든 풍경이 너무 정확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마음만 먹으면, 옹성우는 황민현을 이해할 순 있었다. 베이글 안에 담긴 메시지를 해석하듯, 황민현이 굳이 주차 각도를 애매하게 조정하는 일들을 해석할 순 있었다. 긴 연애가 그들에게 남겨준 유산이라면 유산이었다. 한때 불붙어 몸을 섞었던 관계들에게 허가되는,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그대로 알아먹게 하는 감각들. 그러니 성우는 민현을 이해할 순 있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황민현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 애초에 민현과는 헤어진 사이였다. 구남친에게 다정해지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타이밍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민현아. 성우는 베이글을 물었다. 허기를 채우기에 적당한 퍽퍽한 빵이었다. 특별히 맛있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꼭 황민현다운 선택이었다.




/





황민현 대리님. 저 좀 잠시.


성우가 민현의 어깨를 두드리자, 민현이 순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우는 왼손에 자몽에이드까지 든 상태였다. 두 사람은 이야기 나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사람들 많은 곳은 좀 그러니까, 아예 차에 타는 건 어때? 민현이 제안했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짧게 끝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야, 황민현. 차에 타자마자 성우는 존댓말을 집어치웠다. 황민현도 불퉁하게 ‘왜’라고 답변했다.


“왜 불렀는지 몰라서 물어?”


민현은 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우물쭈물하는 표정이 저도 제 잘못을 깨닫고 있는 눈치였다. 성우는 그 얼굴이 귀여워 종종 민현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 따라다니지 마. 민현아.”


성우는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너도 알잖아. 나 많이 힘들었던 거.”


혹시 몰랐으면 지금부터 알아 둬. 나 졸라 힘들었어. 다시 시작해보려는 그런 시도도 하지 마. 우리 관계는 이미 끝났고, 물론 널 만나서 반갑지만. 성우는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이제 악수만 하는 사이로 남자. 어른이잖아. 서로의 행복을 빌어줘야지. 


성우는 경쟁 제안 PT 발표에 뛰어든 신입 사원처럼 열성적이었다. 두 손이 현란하게 흔들리며 각종 제스처를 자아냈다. 민현아. 이미 끝난 건 이어붙일 수 없는 거야.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학사인 나보다 석사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민현이 어떤 마음을 품었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히터를 켜지도 않았는데 차 안 공기가 몹시 덥게 느껴졌다. 성우는 문득, 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발견했다. 누가 들어도 눈물 흘릴 법한 열정적 명연설, 관객은 황민현 딱 한 명. 크으. 민현이 감동받은 눈치이지 않을까 멋대로 오해하면서 성우는 눈을 깜빡였다.


“성우야.”


그러나 민현은 나른하기만 했다. 감동받은 기색은 1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회사 슬로건, ‘도전에는 끝이 없다’라며.”

“그래서?”

“좋은 회사 들어왔는데 슬로건대로 살아볼까 해서.”

“야.”


야, 황민현. 너 유학 헛물 먹었다. 토해내라. 안 되면 되게 하라. 도전에 끝이 없다. 그런 건 전후 세대 한국인이나 추구하는 도전 정신이라고. 너 나이도 어리잖아! 어, 거기에 미국 유학도 다녀왔잖아! 거기까지 말하자 민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성우 넌 여전히 재밌다. 너랑 있으면 웃겨 죽겠어. 그 말에 성우는 기분이 조금 좋아질 뻔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민현을 노려보았다. 너 웃기고 싶어서 한 말 아니거든. 이번에는 민현도 표정을 또렷이 바꾸었다. 맞아. 유학. 나 유학 다녀왔지. 


그래. 유학. 그놈의 유학.


애초에 그놈의 유학이 문제였다. 유학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헤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A대 캠퍼스의 장수 커플 경력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물론 아는 사람만 아는 관계였겠지만). 그러나 유학은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헤어짐도 이미 발생한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고요해졌다. 민현은 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남아있다는 눈초리였다. 그 시선이 명확했기에, 성우는 민현에게서 눈을 돌렸다. 알고 싶지 않았다. 황민현의 마음 따위. 정말로. 게다가 민현의 유학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러나 민현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며 성우의 표정만 살폈다. 끝이 없는 전초전이었다.


“야. 황민현. 그러지 마.”


결국 성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뭘.”

“네가… 네가, 합리적이라고 했잖아.”


성우는 웅얼거렸다. 오래된 기억이라 해도 상처는 상처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성우에겐 꽤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자꾸만 꿈에, 같은 상황이 반복될 정도로.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 등줄기가 땀에 젖을 정도로. 황민현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민현은 제가 낸 상처 깊이를 몰라서 이렇게 마구잡이로 치고 드는 것이라고. 성우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울적해졌다. 얘는 진짜 나를 뭐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지금도, 나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헤어지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한 쪽은 황민현이었다. 이별을 고한 사람은 옹성우가 아니었다. 이 사실관계는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네가 합리적이라고 말했어. 헤어지는 게.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성우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민현의 과오를 질책했다.


“맞아. 내가 그랬어.”


민현은 뜻밖에 순순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하자고.”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 아냐, 나도.”


민현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무슨 목적인데.”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미 충분히 솔직하십니다만.”

“사실 후회했거든. 나”

“후회? 네가 후회를 했다고?”

“응. 그렇게 성급하게 헤어지자고 말한 거.”


엄청 후회했어. 왜냐하면 네가 보고 싶었거든. 민현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역사책 속 사담 하나를 들추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성우의 명연설과는 목소리 톤부터 달랐다. 민현이 담담하고 고요했기 때문에 오히려 성우의 화가 들끓었다. 너도 후회 같은 걸 할 줄 알았어? 그 말에 민현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후회할 줄 몰라. 사람인데. 당연하지, 엄청 후회했다고. 뭘 해도 어딜 가도 좋은 것을 먹어도, 자꾸 네가 생각났어. 멋진 척하지 말 걸 그랬다고.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기숙사에서 과제 하다 울고, 다른 사람들이 팔짱 끼고 걷는 거 보다 울고. 발표 잘하는 애 보면 네가 생각나서 울고. 민현이 우는 시늉까지 했다. 성우에게는 뜻밖의 고백들만 줄줄 이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연들이었다. 


“지금 와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tmi인데.”


성우가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그래도 좀 들어주라.”

“싫어. 안 들을래. 올라갈래.”


성우는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성우가 거부의 몸짓을 보이며 차 문 손잡이를 잡자 민현이 성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지 말고 좀. 네가 나 울린 게 수백 번인데.”


좀 봐줘라. 우리 처음 했을 때 기억나? 민현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뾰족해졌다. 침대에서 내가 아프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근데 네가 거기서. 어? 하나도 안 봐주더니 그냥 그렇게 삽입…. 그 큰 거를 네가. 성우가 황급히 민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악, 지금 와서 그런 얘기는 왜 꺼내는데!


“신경 좀 쓰이라고.”

“지금 와서?”

“도전에 늦은 때는 없대.”

“…너, 김 부장님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


김 부장님이 너희 팀 팀장도 아닌데 왜 이러냐. 이러다가 산악회도 들고 막 그러시겠어. 황민현. 그 말을 끝으로 민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음만 남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든 채 민현은 차 문을 열었다. 성우야, 너는 네 맘대로 해. 나를 무시해도 괜찮아. 나도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니까. 별다른 의도 없어. 그때의 내가 후회스러웠고, 우연히 널 만나 기뻤고, 그래서 너한테 잘해주고 싶을 뿐이야. 다시 사귀자고 이러는 거 아니야. 민현의 말은 아주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무엇 하나 합리적이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성우는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어이가 없어 허, 허 웃었다. 무시해도 괜찮다니. 무시할 수 있었다면 골백번도 무시했겠지. 성우는 차마 그 말만은 꺼내지 못했다. 무언가, 스스로 백기를 드는 기분이었기에. 그래서 그저 옹성우는. 차가운 핸들 속에 왼뺨을 비비면서 기도했다. 


황민현이 얼른 자신의 도전을 포기해주기를.




/





다행히 민현의 도전 정신이 도를 넘지는 않았다.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의 노랫말처럼 민현은 행동했다. 사무실 책상 한편에 커피나 간식거리가 떨어졌고, 성우는 회사 요정(?)이 두고 간 모양이라며 사탕을 삼켰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딘가 민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끔은 필요한 자료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성우는 민현을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무엇을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영민한 민현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체감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성우는 민현 대신 다른 일에 관심을 돌려보기로 했다. 헬스장을 결제할까 소개팅을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성우의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떨어졌다. 누나가 장기 출장을 떠난 사이 한 달 정도만 고양이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평소라면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날의 성우는 아주 흔쾌했다. 흑심 가득한 구남친보다 성가실 존재는 없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미미였다. 작은 회색 고양이가 가져온 애니멀 테라피 효과는 대단했다. 고양이는 귀여웠고 귀여웠고 아무 생각 없이 귀엽기만 했다. 고양이의 존재는 성우의 퇴근 시간까지 앞당겨주었다. 원래 성우는 회사에서 석식비를 챙겨 저녁 먹고 돌아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고양이를 맡은 이후로는 칼퇴근을 선호하게 됐다. 고양이를 맡은 지 삼 주째 되던 날, 행복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는 성우에게 김 인턴이 물었다. 대리님, 연애하세요? 요즘 왜 이렇게 퇴근이 행복해 보이세요? 그 말에 성우는 웃으면서 유쾌하게 답변했다. 그런 거 관심 가지지 말고 네 연애사나 챙기세요.


“연애해?”


비슷한 류의 질문은 지하주차장에서도 반복됐다. 때는 유쾌한 금요일 퇴근길이었다. 성우는 지하주차장에서 민현과 다시 마주쳤다. 평소라면 얼굴을 찌푸리고 얼른 운전석 안쪽에 몸을 구겨 넣었겠지만. 그날은 새로 주문한 고양이 간식이 도착했다는 택배 문자를 받은 금요일이었다. 성우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민현에게 답했다.


“황민현 씨. 본인 연애사나 챙기십쇼.”

“너 말고는 특별히 끌리는 사람도 없는걸.”


유학 생활할 때도 연애 같은 거 안 했어. 나 정말 공부만 했다. 성적도 좋았어. 민현은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아, 옙. 오늘도 대박적 tmi 감사드립니다. 성우는 빈정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황민현이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래서 성우야, 연애하는 거야?


“황민현 씨. 굳이 제가 알려드려야 할 이유?”

“흠. 없지.”

“그럼 관심 가지지 마시고요.”

“우웅. 안 돼? 민현이가 이러케 궁금해 하는데.”


황민현이 갑자기 윙크했다. 오지게 못하는 윙크라서, 두 눈꺼풀이 함께 깜빡이긴 했지만. 성우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너 능글맞아졌다.”

“나이 먹었으니까.”


저 혼자 웃음 버튼이라도 눌렸는지 민현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팝콘처럼 단숨에 터져 나오는 웃음은, 연애 초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 손만 잡아도 떨려서 웃음이 만개하던 시절. 성우는 고민했다. 그냥, 애인 생긴 척을 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고백할까. 황민현을 떨어내기에는 연애 중인 척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성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민현이 뭐라고. 굳이 내가 거짓말까지. 성우는 성큼성큼 민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제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 귀엽지. 고양이다.


“헐. 성우야. 너 고양이 키워?”

“내 고양이는 아니고, 누나 고양이. 이름은 미미.”

“맡아주게 된 거야?”

“어. 그렇게 됐어. 귀엽지?”

“와, 진짜 귀여워.”


민현은 진심으로 고양이가 귀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성우는 문득, 마음 한구석이 말랑해졌다.


“성우야. 나 미미 보러 가면 안 돼?”

“엥? 알레르기도 있는 애가 왜 고양이를 보러 와.”

“약 먹으면 괜찮아. 원래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그땐 유학 준비로 스트레스가 심한 시즌이라서 그랬어. 스트레스 심해지면 알레르기 증상 악화되거든. 사실, 나도 몰랐어.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증상이 심해질지는. 민현은 그렇게 말하고 성우를 바라보았다. 너 그때 많이 당황했었지. 미안. 사과를 입에 올리는 민현의 목소리는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오히려 놀란 쪽은 성우였다. 유학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알레르기가 심해졌다고? 성우에게는 모두 처음 듣는 사실들이었다. 


“유학 준비, 그렇게 힘들었어?”

“당연히 힘들지. 쉬운 일은 아니잖아.”


주제도 모르고, 좋은 곳만 지원해서 얼마나 떨었는데. 민현은 생글생글 웃었다. 이젠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성우는 당황스러웠다. 완벽했던 금요일 퇴근길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너졌다. 민현의 고백은 성우에게 모두 초면의 이야기였다. 성우는 민현이 유학을 준비하는 내내, 민현이 힘들어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가만 생각해보면 당연히 힘들 만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옹성우는 왜, 민현이 힘들다는 사실조차 캐치하지 못했을까. 늘 붙어있었는데도.


황민현이니까, 어련히 잘하겠거니. 민현이는 단정하게 알아서 잘하는 타입이니까. 성우는 늘 민현을 힘차게 응원하고 믿는 입장 속에 있었다. ‘파이팅’이나 ‘넌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 속에서 민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나 떠오르지 않았다. 응원만 받는 대상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혹여나 응원이 아닌 다른 종류의 감정을 원했는지, 당시의 성우는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성우는 제 안의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뒤져보았다. 아무리 검색해봐도 민현이 힘들어했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눈앞의 황민현은 그 시절의 자신이 힘들었다고 선명하게 고백했는데도. 그리고 그 사실은, 오늘의 성우에게 제법 큰 충격으로 와 닿았다. 누구에게나 당연히 힘들만 한 문제를 어떻게 단 한 번도, 힘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야. 힘들었으면 티 좀 내지 그랬어.”


성우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그럴걸 그랬어.”


민현이 성우의 타박을 익숙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나도 티를 좀, 냈어야 했는데. 어려워했던 거 같아. 그런걸. 나도 좀 너처럼 능숙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민현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그 얼굴 때문에 성우는 자꾸만 당황스러워졌고, 당황스러운 마음은 행동을 성급하게 만들었다. 성우는 이제 진심으로 민현과의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과거 연애에서 백 퍼센트 온당한 입장인 줄 알았던 성우였다. 민현이 본심을 드러내지 않아 힘든 건 성우뿐이었다고. 그러나 과거의 옹성우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면? 만약 민현이 티를 냈고 성우가 무심하게 그 사인들을 흘려보냈던 것이라면? 


“그럼 일요일에, 집으로 와.” 


성우는 속살이 드러난 증거들 앞에 덤벙거렸다. 허둥대다 택한 것이 가장 질 나쁜 선택지였다. 미미 보여줄 테니까 일요일 네 시까지 와. 지금 대화를 정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답안을 택해버리고. 성우는 민현의 스마트폰을 받아, 자신의 주소를 손수 입력해주었다. 민현은 성우가 폰 버튼 누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성우야. 그러더니 민현은 가장 중요한 고백도 덧붙였다.


그리고 미안했어, 성우야. 헤어지자고 나쁘게 말한 거. 난 그냥 그때. 롱디의 끝이 무서웠거든.


마지막 고백은 듣지 못한 척했다. 성우는 차 문을 닫았고 시동을 걸었다. 황민현이 그저 무심하고 무정한 구남친으로 남아있길 바랐다. 사실은 몰랐다거나, 사실은 무서웠다거나, 그런 감정만은 정말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에 보자. 성우는 빠르게 차를 몰았고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서울 외곽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미가 아는 체를 했다. 야옹. 성우는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러운 회색 털 뭉치를 안고 있으면, 세상의 혼잡한 일에도 조금 너그러워지곤 했다. 성우는 새로 배송된 고양이 간식 껍질을 까면서 중얼거렸다. 미미야, 어쩌지. 고양이가 간식을 기다리면서 성우 주변을 맴돌았다. 황민현이, 일요일에 온대. 그리고 내가 그걸 승낙해버렸어. 어쩌자고, 어휴, 정말. 미미가 야옹 울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미야.


야옹.


황민현이 미안하대.


야오옹.


걔도 무섭고 겁이 났대.


야옹.


내가 걜 용서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미미는 그저 야옹거리기만 했다. 임시 주인의 번잡한 마음속이야, 고양이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





일요일 오전, 민현을 기다리면서 성우는 대청소를 했다. 곰팡이 제거제를 사와 평소 건너뛰던 화장실 청소까지 마쳤다. 테이블 구석구석 고양이 털을 닦아내는 도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민현인가 싶어 현관문을 여니 누나였다. 누나가 선물 박스를 들고 성우와 마주했다. 미미는. 미미는 잘 있지? 성우의 안부보다 미미의 안부를 궁금해 하며 누나는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미미가 제 주인을 알아보고 갸르릉 소리 높여 울었다.


“누나, 다음 주에 온다며?”


당황스러움에 목소리마저 갈라졌다. 미미와 누나는 뺨을 비비며 신나게 뽀뽀 중이었다.


“미미 보고 싶어서 튀어왔지.”

“헐. 오늘 미미 데려가려고?”

“당근이지. 미미 없이 어떻게 살아!! 미미야!!”


성우의 누나는 거침이 없었다. 가져온 선물 박스를 착착 내려놓더니, 성우의 안부를 형식적으로 물었다. 애인 여부와 질병 유무 등을 체크한 뒤 누나는 이동장 속에 미미를 넣고 빠르게 사라졌다. 미미 보고 싶으면 누나 집 놀러 오고.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용돈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성우의 방은 고양이가 없던 상태로 되돌아갔다. 원주인이 데려가겠다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미 때문에 얽힌 약속이 있다고 설명하지도 못하고. 성우는 얼떨결에 미미를 떠나보냈고 머리를 쥐어 잡았다. 되는 일이 없어. 성우는 잠시 황망하게 집안을 서성거리다 핸드폰을 열었다. 민현에게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말도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고양이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민현아, 미안한데 오늘 못 만날 거 같아.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왜?”

“다른 건 아니고. 고양이가 없어.”

“미미가 없어? 왜? 도망갔어?”


민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누나가 데려갔어.”


생각보다 누나 출장이 일찍 끝났다네. 거기까지 말한 뒤 성우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몰랐어. 오늘 올 줄, 정말 나도 몰랐거든. 민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미미가 도망갔다는 줄 알았어. 걱정했잖아. 성우는 그 말까지 듣고 어쩐지 더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할 말은 전해야 했다.


“그러니까 오지 마. 민현아.”


‘헙’ 하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수화기 너머 민현이 고요해졌다.


“왜?”


굳이 이걸 설명까지 해야 하나.


“왜긴. 고양이가 없잖아.”

“아. 그렇네….”

“미미 보여주기로 했는데, 미안해.”


네가 미안할 건 없지.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답변을 고민하는 듯 망설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서로의 의도가 어떠하든 고양이를 만난다는 목적 하에 체결된 약속이었다. 고양이가 사라졌으니 두 사람이 만날 이유도 없었다. 생일파티 주인공이 빠진 생일파티가 가능할까. 결국 민현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 알겠어. 성우야. 내일 회사에서 만나. 고양이 장난감 사놓은 거 있는데, 그건 내일 줄게. 전화를 끊고 성우는 기분이 묘해졌다. 묘해진 기분이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아 머리카락만 긁적였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오지 않겠다는 답변을 기대하진 않았다.


민현과의 통화를 마치고 성우는 청소 도구를 정돈했다. 민현이 오지 않겠다는데 굳이 집안을 말쑥하게 단장할 것도 없었다. 고양이가 떠난 일요일 오후, 성우는 문득 외로워졌다. 민현에게도 미미에게도 누나에게도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허기진 마음을 과자로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우는 집 앞 편의점까지 천천히 걸었다. 오늘의 픽은 아몬드 초콜릿과 빈츠, 그리고 맥주였다. 성우는 네 개에 만 원 하는 수입 맥주 캔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닐봉지 속에서 캔들이 경쾌하게 부딪혔다. 이거면 일요일 오후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으리라고. 성우는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 집 앞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의 사람과 마주했다. 황민현이었다. 


“민현아?”

“아. 성우야.” 


민현의 얼굴과 옷차림은 멀끔했지만,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너한테 전화 받았을 땐 이미 출발했던 상황이어서. 그래서 집으로 가기도 뭐해서. 민현은 제 손가락들을 연신 비비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우는 아파트 단지 안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각은 오후 네 시였고 시계는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민현이 가까운 동네에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 세종시 쯤일 지도 모른다고. 성우는 그렇게 착각해주기로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성우 너한테 이거 빨리 전해주려고 왔어. 민현은 더듬더듬 속삭이면서 제 손에 걸린 무언가를 내밀었다. 민현의 귓가는 이미 충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현이 건넨 것은 고양이 장난감과 고양이 간식, 그리고 귤이었다. 성우가 귤을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귤은 너 먹어. 네 생각나서 사 왔어. 너 귤 좋아하잖아. 이거 유기농 귤이라 비싸단 말야. 귤이 썩으면 어떻게 해…. 민현은 발끝을 바라보며 그런 말이나 했다. 성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결국 박장대소했다. 


야, 귤이 하루 만에 어떻게 썩어. 


민현은 성우의 합리적인 지적에 얼굴만 붉혔다. 귤 봉지나 건네는 천하의 황민현은 퍽 안쓰럽고 애잔하고 통쾌했다. 성우는 민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민현은 제가 내놓을 것을 다 내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홧홧하게 붉어진 귓가는 가을바람에도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성우는 민현을 회상했다. 황민현은 항상 한 템포가 느렸다. 달리기 대회에서는 늘 꼴찌로 들어왔고, 가위바위보도 항상 지는 타입이었다. 흔한 게임 하나 못해서 엠티에선 늘 설거지 당번이었다. 성우도 게임에 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황민현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더 능숙한 놈이 덜 능숙한 놈을 헤아려주고,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사람을, 너그러이 바라봐줘야지. 성우는 민현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모든 장난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황민현.”

“네.”

“황민현 씨.”

“왜.”

“고양이가, 보고 싶긴 했어?”


어. 당연하지. 나 고양이 보고 싶었다니까. 민현이 불퉁하게 답했다. 그래 고양이는 보고 싶었겠지. 고양이는 귀엽고 귀엽고 귀여운 존재니까. 고양이는 늘 옳았다. 어떤 서투름도 쉬이 용서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현아. 우리는 고양이가 될 수 없잖아. 고양이가 될 수 없는 번잡하고 연약한 사람들끼리. 무언가를 다시 붙여 보겠다고 내내 시끄럽기만 했다.


“좋아. 그럼 다른 질문. 고양이만 보고 싶었어?”


그 질문에는 민현이 대번 성을 냈다.


“야. 옹성우!”

“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맞는데, 나도 사람이거든.”


그 질문은 좀 치사한 것 같아. 나도 수치심 느낀단 말야. 그만 좀 해. 민현은 그렇게 말하고 아파트 현관 유리문 앞에 주저앉았다. 놀이터로 향하던 초등학생 아이들이 '저 형아들 왜 저래'라며 소곤거렸다. 성우는 민현의 곁에 함께 쪼그려 앉아 민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지, 민현아. 구남친이랑 다시 시작하려면 여러 가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단 말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긴 싫잖아, 너도. 그 말에 황민현이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시작할 마음, 있어?


“없겠냐.”

“있어 없어? 너도 정확히 말해.”


민현의 눈이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옹청이, 말 돌리지 마.”

“바보냐. 안 그랬으면 내가.”


네 연락처, 차단부터 했겠지. 스토커로 고소해버리거나.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흑심은 쌍방이었다. 다시 시작할 마음이야 나한테도 있었지. 그 대답을 토해내면서 성우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황민현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로 용서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그러나 민현의 '미안해. 나도 무서웠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성우는 깨달았다. 이미 옹성우는, 황민현을 용서해버리고 말았다고. 애초에 잘생긴 거 하나에 심취해 제대로 털어내지도 못한 관계였다. 자꾸 헤어지는 날의 꿈만 꿔댔던 관계였다. 어쩌면 민현이 의도했던 대로 롱디의 구질구질한 끝을 맛보지 못해서, 그래서 연소하지도 못한 찝찝한 감정들만 자꾸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서. 어쨌거나 그 모든 이유들이 얽히고설켜 민현과 성우를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런 사랑을 어떻게 쉬이, 제 인생에서 놓아버리겠냐고. 게다가 민현은 다시 만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옹성우에게 합리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 점이, 성우에게는 가장 흡족한 부분이었다.


민현아. 방에 고양이는 없지만.


그래도 들어올 거지? 성우가 아파트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성우는 먼저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자동문 센서 근처에서 손을 흔들었다. 민현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민현은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코트 자락부터 털어냈다. 코트 자락을 한 번 쓸고 문 안쪽의 성우와 눈을 마주한 뒤, 민현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비닐봉지가 끊임없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그 방에 고양이가 있더라도 없더라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 놀이터 아이들의 웃음소리, 비닐봉지 속 과자와 맥주와 귤, 그리고 다시금 돌아온 낯설고도 익숙한 누군가의 손끝. 


모든 것이 완벽한, 일요일 오후 두 시였다.





그 방에 고양이가 없더라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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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년른 가을호에 '동물'이라는 주제로 참여했던 작품입니다. 고양이 없는 방에 고양이를 찾으러 가는, 그런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말이라 싱숭생숭한 일 많으시겠지만, 의연하게 이 시기를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감사했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ㅁ^)/ 



워너원 덕질하는 해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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