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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년] 고백은 종강 전에 부탁드립니다

건우 님과 할로윈 합작

성우야.

응. 민현아.

고백할 거면 종강 전에 해줄래?

 

그 말을 들었을 때 옹성우는 기말 과제 마지막 문단을 타이핑 중이었다. 종강을 목전에 둔 십이월은 성급하게 추워졌다. 전국이 대체로 맑겠으나 낮 최고기온이 -6도를 밑도는 이른 추위가 찾아올 전망입니다. 텔레비전 속 기상캐스터는 숫자를 거듭 강조했다. 단어가 난잡하게 뒤섞였지만 요지는 졸라 추울 거라는 소리였다. 성우는 워드 파일에서 눈을 떼고 민현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민현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일단 너 과제 끝내고 얘기하자.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민현이 텔레비전을 껐다. 과제 마감을 30분 앞두고 있었기에, 성우는 우선 그 말에 수긍했다. 문단을 수정하며 성우는 억울해졌다. 애초에 화제를 꺼낸 것은 자신도 아니었는데.

 

경영학과 3학년 과대 옹성우는 종종 몹시 억울한 상황에 처해졌다. 원인은 동기 황민현으로부터 비롯하는 때가 많았다. 황민현은 항상 말만 해. 성우는 민현에게 투덜거렸다. 할로윈 행사를 구경가자는 성우의 제안에 전날부터 기뻐하더니, 당일 아침 ‘오늘 말고 다음에 가자’라며 펑크를 냈다. 할로윈 행사에 다음이 가능한가. 단풍놀이도 아니고. 수업 끝나고 들러야 할 디저트 카페가 있다고 따라갔더니. 민현은 다이어트 중이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성우는 그날 혼자 호박 타르트를 먹었다. 다행히 성우는, 민현의 행동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민현이 악의를 가지고 자신을 욕 먹인다고 믿었다면,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영학과에서 가장 다정한 선배로 꼽힌다는 황민현이었지만. 성우에게는 늘 분간이 어려운 존재였다. 다정은 한데, 착하긴 한데, 어딘가 좀 기묘한. 성우는 민현을 알아갈수록 황민현이 어려웠다. 어쨌거나 나쁘진 않았다. 옹성우는 황민현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처음으로 맘에 든 것은 얼굴, 두 번째로 맘에 든 것은 목소리, 세 번째로 맘에 든 것은 무엇이었더라. 성실이었나. 어쨌거나 마음에 든 상대가 하는 일은, 대부분 호감으로 읽히는 법이다. 그것이 설사 기행에 가까워 보인다 해도.

 

그러나 이번 기행(奇行)은 성우에게도 제법 화가 나는 종류였다. 성우는 서둘러 마지막 문단을 퇴고한 뒤 교수에게 이메일을 전송했다. 과제가 끝나자 감탄 같은 한숨이 터졌다. 끝났어? 책을 읽고 있던 민현이 성우의 한숨에 시선을 높였다. 어, 끝났어. 성우는 딱딱하게 답하면서 컴퓨터 시스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장시간 혹사당한 노트북이 아우성치며 점멸했다. 성우는 과제를 끝내고 민현이 던졌던 말을 곱씹었다. 고백할 거면, 종강 전에 하라고? 잠이 부족해 피곤해진 머리를 털어내며 성우는 민현 곁으로 다가갔다. 민현도 제가 읽던 책을 덮어 정리했다. 그래서 민현아. 아까 뭐라고 했지? 그 말에 민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열다섯 번이야."

"뭐?"

"네가 사다 준 자몽에이드가 총 열다섯 번이라고."

 

십 육 주 수업에서 열다섯 번 자몽에이드를 얻어 마셨어. 선배도 아닌 동기 사이에서. 이게 뭘 의미하겠어? 민현은 성우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제 주장을 펼쳤다. 사회 토론 시간에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쓰는 범생이처럼. 졸지에 토론 상대편으로 끌려 나온 옹성우는 민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열다섯 번. 내가 너한테 사다 바친 자몽에이드 개수가 열 번을 넘겼구나. 성우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감정의 가장 명징한 증거들은 숫자로 다가오는 법이다. 십 육 주 수업에서 열다섯 번의 자몽에이드. 매 수업마다 오천 원가량의 지출을 꾸준히 반복했다는 이야기였다. 알바 월급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황민현의 혀끝에 녹아 있었다. 자몽에이드 받고, 가끔은 샌드위치도 사다 줬잖아. 민현의 말에 성우는 덧셈 뺄셈 공식을 바꿨다. 오천 원이 아니었네. 만 원은 넘었겠네. 성우는 또 억울해졌다. 고맙다며 얻어먹고 성우밖에 없다며 치켜세우고. 지금 와서 의미를 불손하게 재해석하는 건 어디서 배운 교양이람. 성우는 조용히 민현을 탓하며 그의 다음 주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눈빛."

"눈빛?"

"네가 나를 볼 때"

 

시선이 좀 그래. 끈적끈적하다고. 그 말을 뱉을 땐 민현의 귓가도 붉어졌다. 경영학과 과탑 황민현이 내놓은 두 번째 증거는 예상외로 빈약했다. 직접증거도 아닌, 정황상 증거로 나를 몰아간다 이거지. 옹성우는 코웃음을 쳤다. ‘끈적끈적하다’는 표현은 어딜 봐도 주관적이었다. 옹성우가 항변했다. 내 시선이 끈적끈적하다? 그건 그냥 민현이 네 착각 아닐까? 네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성우의 반격에 민현이 생각에 잠겼다. 민현이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지나치게 산뜻한 답변이었기에, 성우는 문득 불쾌해졌다. 그러면 뭐, 어쩌라는 건지. 고백할 거면 종강 전이 좋다고 종알거리더니 내세운 근거들은 터무니없이 주관적이다. 민현이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옹성우는 황민현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성우는 종강 전에도 종강 후에도 민현에게 고백할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옹성우는 황민현을 좋아하는가? 그 질문에는 YES라고 답할 수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범주가 넓어지면 성우 역시 말문이 막혔다. 옹성우는 황민현을 사랑하는가? 성우는 민현을 좋아했지만, 성애에 가까운 감정은 아니었다. 단순히 우정이라고 평가하기엔 그것도 애매했지만. 곁에 있으면 좋았고 곁에 있으면 편했고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으나 섹스까지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마냥 순정은 아니었으나 에로스적인 방식도 아닌 어딘가. 애초에 옹성우와 황민현은 같은 성별의 동갑내기였다. 두 사람 다 남자.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의 연애가 가능한가. 그 질문부터 시작해야 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옹성우는, 민현과의 섹스를 더듬어볼 상상력까진 부족했다. 섹스를 상상할 수 없는 관계라면 심플해진다. 순탄한 연애까지는 못 가겠구나, 그렇게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얼굴이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관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성우는 민현에게 열다섯 번의 자몽에이드를 마음껏 대접했다. 우정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이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성우는 이 관계가 마음에 들었고, 관계의 확장까지 고려하진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일지라도, 친구 사이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친구니까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친구니까 매 수업마다 간식도 사줄 수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뭐. 성우는 민현도 같은 마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백을 이야기하는 십이월의 밤, 황민현의 얼굴은 더없이 낯설어 보였다. 성우는 민현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사실 민현은 성우보다 유별났다. 비흡연자인 민현은, 흡연자인 성우가 담배 타임을 가질 때마다 그를 쫓아 후문 구석으로 향했다. 담배 연기가 싫다면서도 민현은 성우 곁에 머물렀다. 덕분에 황민현은 선배들에게 흡연자로 오인받았다. 성우가 도서관에서 필요하다는 책이 있으면 미리 빌려다 주기도 했다. 민현의 호의도 동갑내기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통용되는 감정은 아니었다. 경영학과 3학년 과대 옹성우는 자신의 인싸 경력을 내걸고 증명할 수 있었다. 황민현도 약간은, 약간은 다르다고. 술 취한 밤에 황민현은 자꾸만 옹성우를 불렀다. 성우는 술 취한 민현을 자취방 침대 위에 던져놓고 저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 일이 벌써 다섯 번째. 열다섯 번의 자몽에이드보다 다섯 번의 긴급 출동이 더 사랑에 가깝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옹성우는 황민현의 뻔뻔한 낯짝에 화가 났다. 민현아, 말은 바로 해야지. 성우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고백하고 싶은 건 너 아니야?"

"내가 성우 너한테 고백하고 싶어 한다고?"

 

민현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런 소리 꺼낸 거 아냐."


성우는 차분할 수 없었다. 


"화났어?"

"민현아, 너는 왜 매번 말만 해?"

 

매번 왜, 알 수 없는 존재처럼 굴어대는지. 민현의 그런 부분이 좋았지만 때론 서운하기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약속해놓고, 민현은 종종 성우가 먹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여기 일인 일 메뉴라니까. 성우가 난처한 듯 권유해도 민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주 감량 목표 못 채웠어, 안 돼. 민현은 운동을 싫어했지만, 체력이 부족하면 공부도 할 수 없다며 꾸준히 헬스장에 다녔다.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단백질 파우더까지 주문해서 먹고 있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하는 성격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밥 약속을 잡아놓고 혼밥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성우였다. 이럴 거면 약속을 다음에 잡아도 괜찮았는데. 웃으면서 말했지만 조금은 화가 났고, 민현은 그때도 성우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성우야, 화났어?

 

"화났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사과…해야지."

"사과로 끝낼 일이 아니지 않니?"

"그래도 하긴 해야지. 내가 경솔했어. 미안해."

 

황민현이 깔끔하게 사과해버렸기 때문에, 성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성우는 던져둔 담뱃갑을 쥐고 겉옷을 걸쳤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민현은 잠잠했다. 평소처럼 담배 타임에 쪼르륵 따라 나와 곁을 지킬 생각까진 없다는 듯. 말간 표정으로 민현은 성우를 바라보았다. 성우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민현은 답이 없었고, 잠시 돌아본 민현의 등은 부드럽게 굽어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마지막 과제를 마무리했지만,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쟤는 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매캐하게 목 안을 채웠다. 재채기하며 뱉어내기에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더럽게 맛없는 담배 연기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황민현의 화법 같은 것들도. 담배 한 대를 마저 태우고 나니 머리가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성우는 꽁초를 비벼 끈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민현은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종강 전이어야 하는데? 다소 개운해진 얼굴로 성우가 물었다. 성우는 민현의 방학 계획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성우는 인싸 본능에 충실했고, 덕분에 두 과목에서 재수강 학점을 받았다. 겨울 계절학기가 예비된 방학이었다. 민현의 방학 계획을 들은 적은 없지만 장기 여행을 떠나거나 계절 학기를 듣는 종류는 아니었을 것이다. 성우의 질문에 민현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민현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제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즐겨찾기 목록에 성우의 이름이 단정히 올라 있었다. 성우는 민현의 카카오톡 알림창 순서가 마음에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민현은 한참 카카오톡 대화창을 내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사진 좀 봐줄래? 예쁘장한 여자 하나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네."

"성격도 좋대."

"소개팅해?"

"아니, 맞선."

"스물네 살이 무슨 맞선이야."

"성우야, 사실."

 

나 방학 내내 맞선 봐야 해. 올 방학에 예비 신부 구해오래. 옹성우는 첩첩산중이라는 사자성어를 기억해냈다. 산과 산이 겹쳐, 길을 잃었다. 자몽에이드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끝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방금 제출한 내 과제보다 비약이 심한 것 같아. 성우는 제 이마를 짚으면서 민현을 바라보았다. 나 멀미 나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좀 천천히 설명해줄래?

 

 

 

/

 

 

 

민현이 꺼낸 이야기는 이러했다. 사실 저가 H 기업 모 계열사 대표의 차남(민현은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성우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이었는데, H 기업은 집안 특성상 결혼과 출산을 서두른다는 이야기였다. 민현이 국내 굴지 기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이십 대 중반부터 맞선을 봐야 한다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요즘은 삼십 대 초반에 결혼해도 빠른 거 아냐? 성우는 상식적으로 반문했고, 민현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조용히 반박했다. 어쩌겠어. 초대 회장님의 명이라는데. 대학 다니면서 살림 차린 누나들도 많아. 우리 집안이 좀.

 

단명하는 추세라서.

 

잘 죽는대. 픽픽. 쓰러져서. 깔끔하게 비명횡사. 민현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럽게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민현의 말에 따르면 집안 어른들 대부분이 오륙십대에 병이나 사고 등으로 비명횡사했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이 관습화되었다는 것이다. 성우는 최대한 민현을 이해하려 애썼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쨌거나 무거운 화제였다. 정리해보자. 성우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민현의 말을 정리하면 결혼을 빨리 결정하는 집안 특성상, 민현은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맞선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맞지?"

"깔끔하네."

"그래서 종강 전에, 고백을 하라 이거고."

"연애하는 사람이 맞선을 볼 순 없잖아."

 

이제야 민현의 수수께끼 같던 선문답에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쉽고 가벼워 보이는 고백은, 제 나름대로 진중한 기색을 띄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러면 민현아. 성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맞선을 피할 순 있어?"

"없지."


몹시도 경쾌한 답변이었다.


"민현아, 만약에 너랑 나랑 사귄다고 가정해보자. 너랑 나랑 존나 붙어먹은 다음에, 너는 나를 홀랑 버리고 장가가버린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넌 그런 사람이랑 연애할 수 있어?"

"연애가 꼭 결혼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잖아."

"네 말도 맞지만."

 

언젠가 버려지기 위해 연애를 시작할 순 없잖아. 성우가 한숨을 쉬었다. 로맨티시스트는 아니었지만 허무주의자도 아니었다. 성우는 종종 민현과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곤 했다. 만약 황민현이 여자였다면, 혹은 옹성우가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아침마다 사다 바친 자몽에이드 숫자가 다섯을 채우기도 전에 이미 섹스했을지도 모른다고. CC가 되어 얘는 내 애인이니까 술자리에서 술 많이 먹이면 죽여버린다고 공표했을지도 모른다고. 꽐라가 되어버린 민현에게 껄떡거리며 2학기를 성욕으로 탕진하고, 재수강 과목이 다섯 개를 넘겼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민현도 과탑까지는 어려웠을지 모른다고. 그런 상상을 종종 해보곤 했다. 그러나 민현이 여자가 될 일은 없었다. 성우가 여자가 될 일이 없는 것처럼. 꾹꾹 눌러 참은 감정까진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관계. 옹성우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애정을 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일방적인 애정은 차라리 편안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황민현이 구태여,

'고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부터.

 

이게 썸인지 뭔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논증인지 뭔지. 맞선에서 도피하기 위해 타인을 휘두르는 무례함인지, 이젠 정말 무엇인지. 성우는 몸을 눕혔다. 기말 과제에 매달린 탓에 몸과 마음이 피곤했다. 황민현은 옹성우를 떠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민현조차 제 욕망이 불투명했다는 점이다. 성우도 민현도, 서로에게 관계의 방향성을 미루고만 싶었다. 성우는 민현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붙여 누웠다. 성우가 시선을 올려 맞추니, 민현도 성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맞지만 친구는 아닌. 연인은 절대 아닌. 결혼은 말도 안 되는. 그렇다고 섹파가 될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 속에 관계가 규정되고 있었다. 성우가 손을 뻗어 민현의 무른 뺨을 만졌다. 알맣게 잘 익은 피부가 손가락 사이에 달라붙었다. 키스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섹스는. 섹스까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우조차 스스로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성우는, 민현에게 질문해보기로 했다.

 

"넌 나랑 어쩌고 싶어?"

"솔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너 나랑 자고 싶어?"

"그런 거까진 아닌데."

"나도 그래."

"근데 키스 정도는 하고 싶어."

 

황민현은 솔직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난감한 얼굴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제 감정을 뱉어내는 민현을 바라보며, 성우는 조금 웃었다.

 

"너 되게 웃긴다."

"너는 아니야?"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해 봐."


민현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유연하게 파고들었고, 성우는 혀끝을 내밀어 민현의 입술을 핥았다. 말캉거리는 입술이 다정하게 감겨왔다. 민현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성우의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순정적이고 순종적인 입맞춤이었다.


"키스는 가능하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민현이 답했다. 


"애초에 고백 얘기는 왜 꺼냈는데 민현아. 고백받고 싶은 건 너 아냐?

"……."

"내가, 맞선 말려줬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 애초에 네가 말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재벌 3세가 내 친구라니."

"재벌 3세는 아니야. 나 본가 혈통 아니거든."

"본가 나누는 것도 되게 있는 집 자식 같다."

"그런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성우는 다시 리모컨을 붙잡아 전원 버튼을 눌렀다. TV를 켜자 다른 얼굴의 기상캐스터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올 십이월은 맹추위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아침 최저 기온과 낮 최고 기온. 결론만 이야기하면, 어쨌거나 존나 추울 거라는 뜻이었다. 바짝 건조해진 겨울 공기 속에서 성우는 민현의 허벅지 위에 뺨을 비볐다. 허벅지 위에 뺨을 비비다, 민현의 손가락을 붙잡아 가만히 뒤섞어 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몸을 올려 다시 한번 입술도 문대보았다. 섹스를 예비하는 키스도 아니고 애들 장난 같은 뽀뽀도 아닌. 물컹한 입술끼리 뒤섞이고 더듬거리다 멀어졌다. 민현이 문득, 성우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비벼진 살들은 달기보다는, 짭짤했다. 사람의 맛이었다. 

 

"민현아. 너 나랑 연애할 거야?"

"모르겠어."

"너는 왜 아는 게 없어."

"솔직히 말하면, 겁나."


겁나고 무서워. 민현은 솔직하게 답했고 성우도 동의했다. 네 말이 맞아, 나도 겁나. 민현아.


"그 여자 예쁘더라."

"내 취향 아니야."

"그 여자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네."

 

거기까지 말한 뒤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 민현아."

 

누군가는 이 문제의 답을 내려야 했다. 언제까지 입술만 빨아댈 순 없었다. 과제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마감일은 다가오는 것처럼. 감정을 마감하기 위해 성우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성우는 자신이 종결자의 역할을 떠맡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서 열다섯 번째 자몽에이드를 카드 결제하는 순간까지 판단을 미루고 있었지만.

 

"우리 그냥 친구로 남아."

"성우야."

"그게 너도 나도 편할 거 아냐."

 

섹스는 하지 않았다. 입술만 좀 비볐을 뿐이지. 그런 관계라면 아직 괜찮아. 돌아갈 수 있어. 옹성우는 황민현을 성급히 제 방 안에서 밀어내며 종알거렸다. 맞선 잘 보고, 경과보고 해. 아니, 너한테는 정확히 말하는 편이 낫겠지. 하지 마. 경과보고 같은 거 하지 말고 방학 내내 맞선 얘기 입에 올리지도 마. 네가 부자니까 이제 커피는 네가 사. 열여섯 번째 자몽에이드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성우는 제가 하고 싶은 말들만 서둘러 내뱉은 뒤 민현을 자취방에서 몰아냈다. 안녕이라는 인사 같은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찬 것도 차인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민현도 그러했을 테지만, 그런 것까지 이해해주기에 성우는 지나치게 피곤했다. 민현을 몰아낸 뒤 성우는 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잠이 고팠다. 성우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고 스마트폰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성우는 욕실로 향했다. 겨울이었는데도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잔 탓인지 몸이 찐득거렸다. 아침이었고, 샤워는 필요했다. 성우는 욕실 안으로 향했다. 


문득, 성우는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

 

 

종강 후의 삶도 바빴다. 


계절학기가 바로 시작됐기 때문에 여유를 즐길 틈도 없었다. 옹성우는 비정기적인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와 과제를 반복했다. 민현은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맞선 이야기를 하지 말란 뜻이었지, 연락을 끊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성우는 기분이 더러웠기 때문에 종종 소개팅을 했다. 부러 다른 과의 예쁜 애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캐럴송이 넘쳐나는 십이월이었다.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들떠서, 연애하고 싶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연애를 시작하기에 지나치게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어떤 관계도 성우를 유쾌하게 만들진 못했다. 사람은 됐고 돈이나 벌자 싶어 알바를 늘렸다. 애인도 없는데 돈이나 벌어야지. 성우는 술을 마시면서 동기들과 낄낄거렸다. 

 

크리스마스 직전의 주말 아침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잠에서 깼다. 사진 모델을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촬영지는 호텔 카페라고 했다. 개인 포트폴리오로 삼을 작업이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했지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옷장에서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머리를 다듬었다. 주말의 호텔 커피숍은 부산스러웠다. 호텔 로비에서 트리 장식이 화려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빨간 목도리를 매고 밝게 웃었다. 성우는 어색하게 일일 고용주와 통성명을 나누었다. 붐비는 카페에 앉아 사진을 찍혔다. 아직 학생이라는 업계 지망생은 적은 페이를 제시했고, 성우는 액수를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성우는 자신이 조금 몰려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이를 듣지도 않고 알바를 하러 왔다니. 마음이 풀린 성우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고 카메라를 든 학생은 나름대로 구도를 잡았다. 촬영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 시간 내외로 촬영 작업이 완료됐고 작가가 고맙다며 인사를 청했다. 사진, 보내드릴 테니까 이메일 주소 주실래요? 성우는 이메일 주소를 적어준 뒤, 다시 카페 의자에 앉았다.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귀찮은 십이월이었다.

 

기상캐스터가 예보한 대로 올 겨울은 냉혹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제를 위해 책을 고르고 발표 수업을 반복하는 동안, 스마트폰은 고요했다. 성우를 찾는 사람은 많았으나 민현의 메시지만은 고요했다는 뜻이다. 형. 오빠. 성우야. 후배님. 자신의 이름이 몇 번이고 다르게 불리는 사이, 성우는 민현을 떠올렸다. 옹성우는 황민현에게, 왜 자몽에이드를 열다섯 번이나 사주었는가. 거기에 정말 흑심은 없었는가. 그러나, 흑심이 있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황민현은 종강 직전의 밤, 왜 입을 맞추었는가. 옹성우는 그 신호에 어떻게 답했어야 했는가. 혀라도 섞고 섹스라도 했어야, 완벽해졌을까? 


성우는 몇 번이고 고민했다. 황민현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까. 잘 지내고 있어? 왜 연락이 없어. 크리스마스에 시간 되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황민현은 벌써 그 여자를 만났을까. 예쁘게 생긴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모든 관계에 이름표가 붙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애매하게 내버려 두는 사이도 때론 필요하겠지만. 종강 직전의 밤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이미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관계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민현이는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낸 걸까. 성우는 민현이 궁금했다. 자꾸만 궁금해졌는데, 민현은 무엇 하나 제대로 답변해주지 않았다. 성우는 몸을 일으켜 다시 커피를 주문했다. 평소의 선택이라면 캐러멜 마키아토였겠지만, 그날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래야 하는 기분이었다. 이것만 다 마시고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일어나 코인 노래방이나 가야지. 성우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의 여자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단정한 옷차림. 여자는 금세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성우의 시선은 오래도록 그녀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어디서 저 여자를 봤더라. 성우가 눈을 옆으로 흘겨 떴다.

 

아.

 

여자는 민현의 맞선 상대였다. 셀카로 찍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뻤다. 여자가 앉은 테이블을 자세히 살피니, 익숙한 뒷모습이 얽혀왔다. 민현이었다.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민현은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딱, 초보자의 맞선 같아 보이는 자리. 여자는 다정해 보였고, 민현의 말에 자꾸만 웃어주었다. 누가 봐도 선남선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 성우는 그들이 만들어낸 온당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적합하고 합당하고 마땅한 짝처럼 보였다. 성우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민현의 얼굴이 눈에 들었다. 황민현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성우는 문득 화가 치밀어올랐다. 멀쩡하게 웃고 있는 민현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았다. 성우는 화장실로 걸어가면서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지. 이 상황에서 제일 좋은 결론은, 이 자리를 모른 척 피해버리는 일.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제일 친한 동기에게 당장 소개팅이라도 부탁하는 일. 그리고 다음 학기 학교로 돌아온 민현에게 ‘맞선 상대가 예쁘더라’라고 아는 척하는 정도의 일. 성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십이월이 지나치게 추웠다는 점에 있다. 난방이 충분한 카페임에도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 덜덜 떨렸다. 성우는 화장실 문 앞까지 다가갔다가 몸을 돌렸다. 멀리서 캐롤이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자장가를 연상시키는 다정한 목소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성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재킷을 챙겼다. 반도 마시지 못한 아메리카노를 방치한 채 성우는 걸음을 옮겼다. 고백할 거면, 종강 전에 해줄래? 민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됐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무례하고 심술궂었던 제안. 고백을 원했다면, 네가 먼저 했어야지. 내 시선이 끈적했다면, 네 시선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시선이 얽히던 순간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던 건 있다. 이 애는 나를 좋아한다고. 싫어하진 않는다고. 경영학과 3학년 옹성우는 지는 게임은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황민현을 위해 자몽에이드를 결제했던 건, 이 게임에서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우는 입술 근육을 정돈했다. 지금 옹성우는, 자신이 예쁘게 웃어야 할 타이밍임을 알았다.

 

"민현아."

 

경쾌한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민현이 놀란 표정으로 성우를 돌아보았다. 성우야. 민현이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오고.

 

"커피 마시러 왔지."

"여기 집에서 멀잖아. 멀리 왔네."

"셀프 사치 부리러 왔지."


안녕하세요, 성우가 눈앞의 여성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여성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간만에 보는 것 같아."

"그러니까. 한 이 주 만이지?"

"응. 그런데 성우야. 내가 지금 얘기 중이라서. 이따 연락해도 될까?"


민현이 정말로 반갑다는 듯 성우를 반겨주었다. 말간 얼굴이었다. 정말 사이좋은 친구를 어르는 것처럼, 반가운 미소.


"안 할 거잖아."

"어?"

"연락, 안 할 거잖아."

 

그 얼굴을, 곤란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성우는 즐겁게 웃었다. 늘 태연하던 민현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도 사랑이라면. 태연하고 단정한 황민현의 얼굴을 서너 번 구기고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도, 사랑이라면.

 

"왜 연락 안 했어."

"네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맞선 얘기 하지 말라는 거지. 연락을 끊으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성우야. 다음에 얘기하자."

 

지은 씨, 죄송해요. 민현은 시선을 피했다. 성우를 밀어내겠다는 눈초리였다. 눈앞의 여성은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우는 이 상황이 점점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민현이 종강의 밤, 가벼운 목소리로 고백을 언급했던 것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성우는 이제 모든 것이 조금 귀찮아졌다. 고백이고 관계고, 온당한 것이고 불온한 것이고, 황민현과의 관계고 뭐고, 다 정리해버리고 싶었다. 어쨌거나 나는 참았어. 나는 꽤, 참았다고. 망칠 계기를 던진 건 민현이었다. 고백을 입에 올린 것도 황민현이 먼저, 입을 문댄 것도 황민현이 먼저. 성우는 몇 가지 증거 자료를 제출한 뒤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졌다. 게다가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크리스마스에는 축복과 사랑이 필요했다.

 

"지은 씨라고 하는구나."

"네. 그런데요?"

"지은 씨, 근데 그거 알아요?"


얘네 집 단명하는 팔자래요.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통쾌했다. 부러 뱉은 말이 맞았다.

 

"…네?"

"얘네 집 족보가 단명이 추세래요."

"저기요."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구신진 모르겠는데, 대체 무슨 행패예요?"

"아, 전 옹성우라고 해요. 공성우 아니고, 홍성우 아니고, 옹성우입니다."

"옹성우든 홍성우든. 저 민현 씨랑 얘기 중인 거 안 보이세요?"

"보여요."

"보이면 좀 꺼져주실래요?"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셨죠. 원래 제가 이런 성격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성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성우는 이미 의자 안에 몸을 구겨 넣고, 반짝이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를 떠나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민현 씨, 이 사람 뭐예요?"

"죄송해요. 제 친구인데, 제가 실수한 게 있어서 화가 났나 봐요."

"민현아. 네가 한 건 실수가 아니지. 명백한 의도가 있었잖아."

"아냐. 내가 실수했던 거 같아."

"후웅. 이제 그런 변명은 안 통하눈데."

 

옹성우는 황민현에게 자꾸만 무례해지고 싶었다.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마음으로. 고백할 거면 종강 전에 해달라니, 그 얼마나 오만하고 무례한 부탁인가. 다정한 목소리를 한다고 모든 게 다정해지는 건 아니란 말이지. 성우는 민현을 바라보면서 좀 웃었다. 이제는 민현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체념한 듯한 민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성우는 민현의 손을 쥐었다. 그러니까 연락하라고 했잖아. 민현아, 네가 조별 과제를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네가 조장인데. 죄송해요. 지은 씨. 민현이가 저희 과제를 다 망쳐서요. 제가 너무 화가 나서요. 물론 다 거짓말이었다. 민현은 성우와 팀 과제를 한 적이 없었고, 했다 한들 망친 적도 없었다. 교수님이 협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잖아, 민현아. 너랑 나랑, 협동을 했어야 했는데. 성우는 이제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있었다.

 

"내가 망쳤어?"

"그래, 네가 다 망쳤잖아."


민현이 체념한 듯 말을 받아쳤다.


"제출일이 언제인데."

"이주 전. 마감도 지났고 끝났어."

"수정 기한 없어?"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해."

"나도 몰라."

"결국 제자리구나."

"이제 인정하자, 민현아."

"뭘?"

"흑심 없는 자몽에이드는 없었어. 너도 알고 있잖아. 난 샌드위치까지 샀다고."

 

이제는 옹성우가 황민현에게 선문답을 던질 차례였다. 졸지에 지은은 맞선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전락했다. 성우는 기분이 유쾌해져 자꾸만 헛소리를 했고, 민현은 지은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 헛소리를 받아주었다. 과제가 어쩌고 교수가 어쩌고 종강이 어쩌고. 지은은 소란스러운 대화 속에서 빨대를 씹었다. 지은이 빨대를 열 번 정도 씹었을 때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저기요, 성우 씨라고 했나? 지은이 검은색 클러치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민현 씨도 이 번호 알죠? 지은은 부러 제 액정을 보여주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중년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은이 부러 큰 목소리로 불평을 토해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도가 단단히 담긴 선명한 목소리였다. 이모님. 민현 씨, 괜찮은 사람인데 단점이 너무 명확하네요. 여자한테 안 서는 거 같아요. 발기도 안 되는 상대를 붙여주시면 어떻게 해요. 얼굴만 멀쩡하다고 남자가 아닌데. 

 

지은이 깔끔하게 통화를 마치고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게이 새끼들아, 치정 싸움은 모텔에서 해. 난 간다. 지은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연분홍빛 손톱이 호텔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민현 씨, 저 나이 속였어요. 우리 동갑 아니고 제가 세 살 연상이에요. 제가 누나니까 이 거지꼴은 봐 드릴게요. 그리고 저 옹성우인가 뭔가랑 행복하게 사세요. 꼴값 같으니까 현실에서 두 번 다시 드라마 찍지 마시고요. 잘생겨서 봐줬다. 개새끼들아. 둘 다 병신 같은 거 알죠? 과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게이 새끼들이. 지은은 거기까지 말한 뒤 벌떡 일어나 두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그녀가 걸어간 자리 너머 구두 소리만이 또각또각 남았다. 카페 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남은 성우와 민현을 바라보았다. 게이 새끼들이래. 누군가 소근거렸다. 치정 싸움이래. 

 

남겨진 민현과 성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성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페 안 모든 사람들에게 멋쩍게 웃어주었다. 민현도 성우도 파악하지 못했던 관계를, 초면의 지은이 명확하게 명징해주었다. 게이 새끼들이라니. 성우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쪽팔리고 거지 같고 쓰레기 같아진 이 상황에서야, 성우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야. 옹성우, 나 엄마한테 죽었어. 그 뚜쟁이 이모님이 제일 평판 좋단 말이야. 민현은 제 고개를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모든 게 난장판이 된 이후에야 옹성우는 깨달았다. 불행해진 뒤에야 깨닫는 사랑스러움도 있다고. 성우는 민현을 안아주었다. 서는지 안 서는지, 내가 확인해주면 되잖아. 내가 책임질게. 민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야, 너도 섹스까진 못할 것 같다며. 성우는 웃었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나 과제 하다 도망 나왔거든. 그 말에 황민현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어쩔 건데, 내 평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약간은 미친 것 같다고.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호텔 로비 앞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모든 것을 용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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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p.305)


건우 님과 할로윈 기념 연성 합작입니다! 할로윈 기념이지만 딱히 할로윈 얘기는 아니네요 ㅋㅋㅋ 건우 님이 주신 연성 주제는 위 문장이었습니다. 저는 영화 대부의 /그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야/를 주제로 드렸고요^.^ 불행해질 권리에 초점을 두고,, 써보았습니다. 늦었지만 해피 할로윈 보내셨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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