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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년] 성장통 02

수음의 밤 이후 황민현과 내 사이가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다.

 

그건 아마 황민현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애에게는 유독 꼿꼿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흔들릴 것 같은 순간에도 황민현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구잡이로 쿵쾅거리는 마음도 고요해지곤 했다. 마음이 어떠하든 예습 복습이 우선이었다. 너랑 공부하는 거 좋아. 황민현을 생각하며 수음한 밤 이후로. 나는 매일 같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거기서 황민현이 흔들렸다면 우리 관계는 조금 다른 모양새로 흘러갔겠지. 그러나 황민현은 그러지 않았다. 그 애는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익숙해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집에서 눈도 떼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래, 옹성우 너 나랑 공부하는 거 좋아해. 그러니까 이제 십이 페이지부터 다시 풀자. 문학 해설지의 파란 글씨 같은 답변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습관처럼 자습실로 향했다. 나는 저녁 간식으로 딸기우유를 챙겼고 황민현은 텀블러에 물을 받았다. 티백을 우려서 차를 마시고, 책을 펴서 투명 포스트잇을 붙였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서로의 간식거리를 나눠 먹었다. 처음에는 가져온 간식거리를 나눠 먹는 수준이었지만, 어느 밤에는 함께 편의점에 가자고 청해보았다. 황민현이 흔쾌하게 수락했다. 우리는 교실 밖으로 나서 천천히 걸었다.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 봄밤은 지나치게 달았다. 손을 잡아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는 건 남학생과 남학생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학생 규칙을 떠올리고 머리를 털어버렸다. 괜히 머쓱해진 손가락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황민현이 대뜸, 내 팔에 손을 감았다. 닿아온 온기가 갑작스러웠다. 우리는 팔짱을 낀 형태가 되었고, 나는 놀라서 황민현을 바라봤다.

 

“뭐야.”

“추워서.”

 

봄바람이 쌀쌀하긴 했다. 황민현은 아무 말 없이 내 팔을 붙들었다. 손잡는 것보다 팔짱이 더 해괴한 광경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애를 조금 밀어냈다. 야, 민현아. 남자끼리 뭐 하는 거야. 황민현은 그 말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손잡자. 나 추워.”


‘손잡을래?’도 아니고 ‘손잡자’로 나오는 황민현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스운 변명이지만, 나는 모범생이지 않은가. 모범생이란 제게 찾아드는 타인의 부탁을 쉬이 거절하기 어려운 법이다. 태초부터 그렇게 길러졌고 학창시절을 거쳐 가며 완성됐다. 나는 결국 그 애의 손을 쥐고 편의점까지 걸었다. 도보로 이삼 분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걷는 내내 마음이 울렸다. 민현이가 춥다고 한 거니까. 추워서 그러니까. 변명거리를 긁어모아 시선을 가로등 따위로 향했다. 나는 그 애의 따뜻한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누군가 우리를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누구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황민현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흔들리지 않는 척했다. 밤은 어두웠고 별은 고요했다. 다행히 누구도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삼 분이면 도착할 편의점이 참으로 멀었다. 부러 천천히 걸은 탓도 있었다. 그 애도 자연히 속도를 늦춰 내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잡고 있는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축축해진 손바닥이 부끄러워 잠시 황민현의 손을 놓았다. 손을 놓은 시간이 어색하지 않게 서둘러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나는 다시 황민현의 손을 잡고 그 손을 내 점퍼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따뜻하잖아. 황민현의 손가락이 점퍼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렸다. 작은 벌레들이 손 위로 움직이는 것 같은. 해괴하고도 따뜻한 느낌. 기분 좋지만 또 한편으로는 낯부끄러운 감촉이었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골랐다. 단 과자와 딸기 우유 같은 것들. 과자를 주워 담으면서 황민현이 ‘성우야 너 오뎅 국물도 먹을래?’라고 물었다. 사월인데도 아직 편의점 오뎅 꼬치가 남아 있었다. 나는 내가 오뎅 정도는 사주겠다고 말했다. 황민현이 됐다고 말하면서 제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결제하면서 황민현이 입을 열었다.

 

“성우야”

“웅.”

“내가 사주는 거니까 맛있게 먹어.”

“헐 대박. 완전 감사.”

“그래. 감사해야지.”

 

너는 노란 꼬치 비싼 거로 먹어. 황민현은 빨간 꼬치를 집어 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김이 오르는 오뎅 섹션 앞에서 우리는 배를 채웠다. 오뎅 꼬치를 우물거리다가, 황민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성우야, 나 사실 장학생이야. 평범한 목소리를 가장했지만 아주 평온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끝이 조금 떨려오는 듯도 했다. 오뎅 꼬치를 우물거리면서 그 애를 바라봤다. 황민현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지?”

“어… 웅. 알아.”

“너한테는 말해주고 싶었어.”

 

비밀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황민현의 고백을 바로 이해했다. 황민현은 장학생이었다. 이 문장이 함축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황민현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특별 전형 학생이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선 일정 이상의 성적을 충족해야 했고, 열공해야 했다. 어쩌면 집안 사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부모가정이라든가, 차상위계층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일 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민현은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을, ‘장학생’이라는 단어 안에서 읽어 내릴 수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학비가 비싼 편이었다. 분기별 납입금이 거의 대학 등록금과 흡사했다. 고등학교 학비가 비싼 이유는 딱 하나다. 학생들을 좀 더 좋은 대학에 배달했다는 역사. 그 역사 하나로 우리 고등학교는 ‘명문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입학 절차도 까다로워 총 3차로 이어지는 시험 관문을 견뎌내야 했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부분 부유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3차로 이어지는 시험 준비를 감당하려면, 부모의 흔들림 없는 재력이 필요했다. 아이가 흔들리더라도 부모의 돈이 흔들려선 안 됐다.

 

황민현이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라고 우리 사이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아주 타산적인 이유로 나는 황민현이 조금 더 좋아졌다. 그 애는 문제집을 한 권 사면 책이 닳도록 읽어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 사실 이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다. 모범생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복습 방법 중 하나였다. 같은 문제집을 두세 번 다시 풀기. 그러나 그 애가 장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나는 어쩐지 황민현을 대견하다고 여겨버렸다. 대단하다거나 대견하다거나, 존경스럽다거나. 아마도 콩깍지와 비슷한 것. 이미 품은 호감이 자꾸만 몸집을 불려갔다. 호감의 근거들은, 무엇 하나 객관적이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다. 장학생이 아니라면 아닌 대로 황민현을 좋다고 평가했겠지. 그러나 마음이 자꾸만 이유를 필요로 했다. 작은 증거들을 긁어모아 호감을 증명하려고.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냉장고에서 비싼 과일을 골라 간식통에 넣었다. 체리나 아보카도, 애플 망고와 같은 것들. 나는 딸기우유보다 과일 도시락을 가져오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황민현은 쉬는 시간에 내가 싸 온 망고를 집어먹었다. 나는 밤늦도록 체리와 망고를 씻고 정리하느라 피곤했고 덕분에 자습시간 내내 졸았다. 너무 졸리면 그냥 자. 깨워줄게. 민현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아예 책상 위에 고개를 묻었다. 한참 꿈속을 헤매는데 두런두런 무언가를 읊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서 황민현이 수학 공식을 외고 있었다. x는 y로. y는 다시 x로. 황민현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건 일종의 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민현아.”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황민현을 불렀다.

 

“응?”

“목소리 듣기 좋다.”

“뭐야.”

“너 목소리가 좀 그래. 올바르고 깔끔하고 약간 시적인…”

“뭐야. 시적이지 않아. 그냥 수학 공식이잖아.”

 

황민현이 조금 웃었다. 좀 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도 너무 졸려. 어제 늦게 잤어. 어느새 황민현의 손바닥이 내 어깨에 와 닿았다. 닿은 손에 힘이 실렸다. 황민현이 내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아프다며 호들갑을 부렸다. 실제로 좀 아프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황민현은 마사지에 재능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야, 그만해. 차라리 내가 해줄게.”

 

나는 몸을 일으켜 민현이의 어깨에 손을 댔다. 황민현의 어깨는 뻣뻣하게 뭉쳐 있었다. 여기가 뭉쳐 있으면 될 공부도 안 되는 거야. 그 애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어깨를 누르고 목덜미 선을 따라 부드럽게 문질렀다. 성우 너 안마 잘한다. 시원해. 황민현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감동이지?”

“어 진짜로… 잘한다.”

“못 하는 게 어딨어 내가.”

 

여기가 제일 아플걸. 나는 민현이의 꽉 뭉친 어깨를 가볍게 짓눌렀다. 그렇게 힘을 주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황민현이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쳤다. 그 비명은, 평소 민현이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늘 같은 톤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던 목소리가 노이즈처럼 튀었다. 아. 황민현도 제 목소리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고 말해줘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튀어 오른 비명은 약간 신음 소리 같기도 해서. 며칠 전 보았던 야동 배우들의 하얀 얼굴과 쭉 찢어진 눈꼬리 같은 것이 떠올랐다. 나는 괜히 민망해졌기 때문에 헛기침을 했다.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았어. 사과하면서 황민현의 목을 마저 안마하려 했으나, 벌게진 귓가와 하얀 목덜미가 자꾸만. 자꾸만 뭔가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해서. 나는 서둘러 내 자리로 돌아섰다. 안마 끝! 자습실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스며드는 마음들을 밀어내기 위해 나는 아무 말 없이 책을 펼쳤다. 책 내용 따위야 아무것도 눈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이 시에서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그런 말들을 빠르게 내뱉으며 머리를 채우고 성욕을 덜어내려 애썼다. 감정을 비우고 이성을 채워 넣으면, 그러면 어디론가 멀쩡한 도착지에 닿을까. 올바른 정답을 골라내야 하는 것처럼. 올바른 정답을 고르고 싶은 마음으로. 자꾸만 몸집을 부풀려가는 마음이 풍선처럼 위태로웠다. 바늘로 찌르면 펑 터져버릴 것처럼. 이제는 내 뺨도 붉어져 있을 것 같았다.

 

“성우야.”

 

황민현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돌아보지 않으니, 그 애의 손이 내 손등 위를 덮었다. 그 애의 손은 축축했고 땀이 많았다. 내가 그 애의 손을 처음 잡았던 편의점의 밤처럼. 나는 그제야 눈을 돌려 황민현을 바라보았다.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이 애와, 섹스할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 때문에 마음이 뛰었다. 왜냐하면 그 눈이, 황민현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우야. 다시 한번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아무 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망고 먹을래?”

 

황민현은 겨우 그런 말이나 했다. 그러더니 다 먹고 남은 망고 부스러기들을 내게 내밀었다. 도시락통은 비어 있었는데도. 나는 그 애의 떨리는 손가락을 봤고 도시락통을 내 쪽으로 당겼다. 망고 부스러기를 찾아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맛있네, 망고. 황민현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톱보다 작은 망고 부스러기가 혀끝에 닿아 알알이 부서졌다. 나는 문득 개미를 씹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우리가 친해지는 만큼 계절도 빠르게 흘러갔다. 봄에 만났던 우리의 관계는 중간고사를 거쳐 어느새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여름이 가까웠다. 그해 여름은 평년보다 더웠기 때문에 춘추복-하복 혼용 기간도 한 주 앞당겨졌다. 나는 공지 프린트물을 받으러 교무실로 걸음을 옮겼고, 같은 프린트물을 배부 받는 1반 반장 황민현과 마주쳤다. 프린트물? 내가 물었고 민현이 ‘응’이라고 답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에는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과학경시대회와 수학경시대회와 사회참여발표 대회 같은 것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나는 사회참여발표 대회를 준비했고 황민현은 수학경시대회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는 지겨웠고 준비 시간은 빠듯했다. 모범생이라고 학교생활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준비들은 늘 힘이 들었다. 기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우리를 힘들게 했다. 민현이가 유독 편안했던 건, 그런 종류의 불안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황민현과 나는 같은 불안을 공유했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자연스레 그 애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장난을 쳤다. 실뜨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의 검지를 툭툭 치다가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손장난에 싫증이 나면 샤프를 쥐고 사회참여발표 대회 원고를 작성했다. 황민현은 내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 애가 먼저 손을 잡아오기도 했다. 자습실 안에서 우리는 가장 평온하고 고요해졌다. 그곳은 우리의 숲이었다. 숲은 장벽처럼 우리를 보호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처럼 웃었다.

 

들어선 마음에 이름표를 붙였다. 자연스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지 않아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으니까. 1단원을 끝내야 2단원에 들어설 수 있는 것처럼. 모범생인 우리는 할 일이 많았다. 프린트물도 나눠줘야 했고 아이들의 숙제도 걷어가야 했으며,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동시에 대회 준비도 함께해야 했다. 마음이 복잡해지면 공식이 외워지지 않았다. 결국, 복잡해진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1단원을 끝내야 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인정했다. 민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아마도 황민현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어떤 순간인지 어떤 연유인지 어떤 증거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이미 충분히 좋아하게 되었다고. 아마도 우리는, 첫사랑을 시작했다고. 그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순간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어떠하든 월요일 아침마다 학생 주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외쳤다. 불순교제는 벌점 50점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말이 잔소리처럼 지겨워졌다. 선생님, 정말 그 벌점을 받은 사람이 있나요? 나는 불퉁한 얼굴로 질문했다. 선생님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퉁명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범생이라는 명찰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다른 아이들이 꺼내면 불온하다 여겨질 질문조차, 너그러이 받아들여졌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답했다. 성우야, 연애가 하고 싶니?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별생각 말고 공부나 해. 연애는 대학 가서 하는 거야. 성우는 잘생겼으니까 여자애들이 줄을 서겠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낮에는 대회 준비 때문에 어깨가 뻐근했고, 밤에는 키가 크느라 다리가 고생스러웠다.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신기하게도 성장통이 심해졌다. 너 다리 아파? 나도 밤마다 아프거든. 쪼그려 내 아킬레스건을 쥐어 잡던 황민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마치 그 말이 저주라도 된 것처럼 무릎과 아킬레스건이 쑤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내 다리를 주물렀다. 내 살성은 민현이에 비해서는 단단한 편이었다. 힘을 줘 다리를 누르면 탄성 있게 튕겨 나왔다. 무르고 부드러운 민현이의 피부와는 달랐다. 나는 내 다리를 주무르며 밤잠을 포기하고 대회 원고를 다시 훑어보았다. 북한의 문제와 아이돌 문화 따위를 동시에 녹여내야 했다. 북한과 아이돌 문화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 내가 쓴 원고는 논리가 빈약했고 지나치게 감성적이었으나 어떻게 퇴고를 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종이를 던지고 침대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황민현이라면 이 원고에 어떤 문장을 덧붙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사실 우리는 다른 부분이 아주 많았다. 옵티머스가 되고 싶다는 황민현을 이해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하지만 그래서. 다른 것들이 많았기에 자꾸만 호기심이 덜컥거렸다.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습실 속 나의 질문은 어느새 결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시를 들이대며 물었다. 출제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 애의 해석이 궁금했다. 이 문장은 어때? 그 애는 바른 답을 읊어주려고 했고 나는 그 애의 말을 막았다. 아니, 해설지 말고. 네 생각은 어떠냐고. 그러자 황민현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내 생각이 궁금해?”

“어. 네 생각이 궁금해.”

“얼마나 궁금한데?”

“존나 많이.”

“성우 너 진짜 웃긴 거 알지.”

“알아.”

 

황민현은 다시 시를 읽었다. 애초에 나는 황민현에게 국어 문제를 질문해본 적이 없었다. 언어는 내 쪽이 좀 더 잘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그 애에게 현대시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나는 이 문장이 좋다고 생각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잖아. 간지러운 느낌이야. 나는 그 말을 귀하게 내 안 쪽 어딘가에 보관했다. 그리고 시를 읽을 때마다 황민현의 평가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면 나도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되었다. 모의고사에서 그 시를 만날 때조차, 목덜미가 조금 간지러운 것도 같다고. 문제를 풀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참여발표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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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고민 중이었는데 '반지의 제왕' 만큼 쓰라는 모 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분량 생각 안 하고 쓰겠습니다 룰루.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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