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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년] 제일노래방 05

인천역은 지하철 1호선 종착역이었다. 마을버스로 시작해 지하철까지 이어지는 환승 경로가 길었다. 빈 좌석을 발견하고 겨우 엉덩이를 붙이면, 다음 정거장에서 어린 애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다시 빈 좌석을 찾으니 이번에는 노인들의 차례였다. ‘여기 앉으세요’ 또는 ‘얘들아, 여기 앉아’. 박지훈은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고 네 번째부턴 자리에 앉는 것을 포기했다. 익숙지 않은 구두 굽 때문에 발가락이 얼얼했다.

 

운동화와 후드티와 청바지가 전부인 옷장이었다. 교복 외에 마땅한 셔츠조차 없었다. 결국 박지훈은 절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셔츠에 키높이 구두 좀 빌려주라. 김영수의 집 앞까지 달려가자 영수가 옷가지를 건네주며 욕설부터 뱉었다. 좆만한 게 어이없어. 키높이 구두 신어도 너 그 형보다 작잖아. 박지훈도 욕설로 응수했다. 어쩌라고. 니가 보태준 거 없잖아.

 

김영수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다는 표정이었다. 좆밥인 게 키 큰 형 좋다고 구두나 빌려 신고. 너는 진짜…. 김영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빠르게 이어지는 험한 말들과 달리, 김영수는 잘 개인 셔츠를 종이봉투에 단정히 넣어주었다. 얼룩 묻히면 죽는다. 비싼 옷이거든. 박지훈은 잠시 곤궁해졌다. 짜장면 먹으러 갈 건데.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햄버거 두 세트에 피시방 3시간 이용권”

 

거기에 롤 아이디도 빌려줄게, 어때?

 

“헐. 시발 개좋아.”

“역시 지훈이밖에 없지?”

 

박지훈이 윙크했다.

 

“…아 미친. 존나 기분 더러워.”

“왜 갑자기 발작이야.”

“됐고. 지금 롤 아이디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흘린 웃음이 아차 싶었는지 김영수가 표정을 다독였다. 너만 보면 머리 아파. 나도 이제 몰라. 재밌게 놀다 와라. 진지한 목소리였다. 친구의 배려에 박지훈도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궁색한 상황이었다. 동급생이 애 딸린 이혼녀와 연애 중이라고 고백해왔다면, 박지훈도 김영수 대가리부터 갈겼을 것이다. ‘엄마를 생각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사람을 약자로 만들었다. 박지훈의 욕망은 황민현에게도 김영수에게도 떳떳하지 못했다. 그건 박지훈에게는 굉장히 낯선 감정이기도 했다. 김영수가 종이봉투를 건네주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힘내라, 지훈아. 무엇을 힘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박지훈도 멋쩍게 답했다.

 

“김영수 개새끼.”

“왜 또.”

“나 좀 그만 좋아해라.”

“뭐래 존나 못생긴 게.”

 

지훈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셔츠부터 다렸다. 직접 다린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 보물처럼 보관했다. 토요일엔 새벽부터 몸치장을 시작했다. 올 초 신체검사에서, 김영수와 박지훈은 거의 엇비슷한 사이즈였다. 그러나 간만에 빌려 입은 영수의 셔츠는 뻐근하고 갑갑했다. 부쩍 자라난 어깨 탓인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깃이 팽팽해졌다. 삼월보다 몸이 자랐나. 박지훈이 혼잣말을 했다. 핏이 맞지 않는 셔츠가 어색했으나 어쨌거나 얼굴이 박지훈이었다.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박지훈이 유튜브에서 남자 왁스 바르는 법 따위를 검색했다. 왁스를 묻혀 머리카락을 정돈하자 예쁜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 올곧은 눈썹이 단정했다.

 

차이나타운 맛집 링크를 카카오톡 대화창에 옮기며, 지훈은 후다닥 방에서 뛰어나왔다. 멋을 낸 얼굴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집 밖으로 향했다. 셔츠를 입고 앞머리를 깐 제 얼굴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엄마, 나, 수행평가. 지금 나가요! 박 사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딜 간다고?”

 

박지훈이 달아나며 소리쳤다. ‘숙제 있어. 김영수 집에서 할 거야’ 철물점 김 사장님도 슈퍼 배 씨 아줌마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내 박지훈은 달리기만 했다. 지하철 화장실까지 도착해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박지훈은 역사 화장실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매만졌다.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핸드폰을 열어 민현에게 문자했다. 형, 11시에 차이나타운 잊지 마세요. 민현이 재깍 답변을 보내왔다. 응, 가고 있어. 좀 이따 만나. 띄어쓰기가 단정한 문자 메시지였다. 문자 메시지 한 통에 마음이 성급하게 두근거렸다.

 

인천역은 지하철 1호선 종착역이었다. 목적지가 멀고 멀었다. 애잔하게 굳어가는 발가락을 쭈뼛쭈뼛 구부렸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황민현에게 차이나타운까지 함께 가자고 권유하진 않았다. 황민현 역시 ‘함께 지하철을 타자’ 따위의 질문을 물어오지 않았다. 형에게는 이미 운전면허가 있을지도 몰랐다. 차가 있는지, 면허가 있는지, 약속 장소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애써 묻지 않았다. 너무 많은 호기심이 형을 부담스럽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질문보다는 상황 속에서, 형을 이해하고 싶었다. 형이 무슨 반찬을 좋아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나 도시락을 포장하던 그때처럼. 그래서 박지훈에겐 오늘의 데이트가 더없이 소중했다. 덤덤한 얼굴로 약속 장소와 시간만을 정했다.

 

지하철 1호선에서는 오래된 것들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소란스러운 승객과 낡은 지하철은 모든 걸 촌스럽게 만들었다. 박지훈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감탄했다. 형한테, 같이 가자고 안 해서 다행이다. 박지훈은 멍하니 차창 밖을 주시했다. 날씨만은 완벽했다. 철로에 반사되는 가을 햇볕에 박지훈이 눈을 깜빡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첫 데이트였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헤아리며 지훈은 감탄했다. 오늘도 잘생겼네. 내일은 더 잘생겨지겠지. 형도 어쩌면, 반할지도 몰라.

 

차려입은 검은 셔츠가 매끈하게 빛났다.

 

 

 

/

 

 

 

개찰구를 지나 인천역 입구로 빠져나오니 주말 여행객이 버글거렸다.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부터 가족 여행객까지. 초가을 옷차림은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반팔을 입었고 누군가는 가디건을 걸쳤다.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들과 롱스커트를 걸친 소녀 떼들이 뛰어다녔다.

 

태풍으로 천둥 치던 밤이 엊그제인데, 날씨가 지나치게 청명해서 어색할 정도였다. 바람은 선선하지만 볕이 따가웠다. 차려입은 셔츠 안쪽으로 열기가 고였다. 등줄기가 후덥지근했다. 검은 셔츠에 맞춰 입은 검은 슬랙스. 올블랙은 과했나 싶으면서도 조금은 설렜다. 특별해야 하는 주말이었다. 앞머리를 넘긴 헤어스타일도 처음이었다. 손부채질을 하며 박지훈은 열심히 걸었다. 거리 어딘가에 형이 있었다.

 

차이나타운 거리는 붉고 노랗고 밝았다. 원색에 사로잡힌 도시는 이천십팔년의 모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테마파크 속에 뚝 떨어진 토끼처럼 붉은 건물들을 살폈다.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제1패루(牌楼), 약속 장소는 그곳이었다. 멋들어진 문짝이 화려하고 촌스러웠다.

 

20분이나 이르게 도착한 상황이었는데도, 민현은 이미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맛 츄파춥스를 쭉쭉 빨고 있던 황민현이 손을 흔들었다. 박지훈은 냉큼 형에게 뛰어갔다. 언제 왔어요? 황민현은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새였다. 헐렁한 블랙 티셔츠와 연한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캡모자를 눌러 쓴 덕분에, 민현의 뾰족한 눈초리가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좀 일찍 와서 산책했어. 민현도 웃으면서 지훈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셔츠 멋지다. 구두도 신었네.

 

네, 형이랑…

 

커플티 같네요! 박지훈이 명랑하게 대꾸했다. 황민현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능숙하게 농담을 받아냈다. 맞네, 우리 둘 다 블랙이네. 누가 보면 맞춰 입은 줄 알겠어. 그냥 맞춰 입은 걸로 할까? 그 말에 박지훈도 유쾌해졌다. 검은 셔츠를 선택한 자신의 안목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지훈아, 날씨 너무 좋다.

 

정말로 그랬다. 형의 말처럼 날씨가 모든 걸 다한 주말이었다. 차이나타운은 특별히 아름답지 않았다. 스크래치 난 붉은 기둥은 세월의 흔적을 짐작게 했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가을 하늘은, 낡은 풍경조차 화보처럼 세련되게 읽어주었다. 민현은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어린아이들이 놓친 풍선에도, 그 풍선 때문에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에도 새파랗게 웃었다. 두 사람은 길거리에서 맛없는 중국 월병을 사 먹었다. 황민현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없다. 누가 이걸 돈 주고 사 먹어? 박지훈이 어벙하게 답했다.

 

“형하고 저요.”

“그렇네, 하하하.”

 

그런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어색하게 굳어있던 구두 속 발가락이 활기를 되찾았다. 박지훈이 맛집을 알아 왔다며 형의 손을 이끌었다. 두 번째 골목에서 세 번째 골목으로 좌측통행. 로드뷰로 공부했던 위치를 복습해가며 민현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점심시간의 차이나타운은 정보 빠른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며 젊은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지훈은 줄을 설까 망설이며 민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민현이 둥그렇게 답했다. 다른 거 먹자. 줄까지 서면 너무 배고파질 것 같아. 더 맛있는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며, 희망찬 이야기를 건넸다. 두 사람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낡은 가게와 밝은 가게와 깨끗한 가게를 빙글빙글 돌아 다시 허름한 가게로 향했다. 허름한 가게가 맛있지 않을까? 민현이 제의했고 박지훈이 동의했다. 두 사람은 조명등이 많이 달린 가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박지훈은 조금 불안해졌다. 제발 중박만 쳐라. 지훈은 간절히 기도했지만 식당 주인이 던지고 간 짜장면 그릇은 척 보기에도 꽝이었다. 혀에 붙는 조미료 맛이 들척지근했다. 동네에서 시켜 먹던 짱개집보다 못했다. 이걸 장사라고 하냐. 지훈칼국수(동네 최고 맛집)의 첫째 아들 박지훈이 미간을 구겼다. 아, 이딴 걸 돈 받고…. 분노가 치솟은 지훈과 달리, 황민현은 묵묵하게 국숫발을 삼키고 있었다.

 

“형”

 

‘맛있어요?’라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이 민현에게 맛있을 리 없었다. 눈앞의 상대가 김영수였다면 욕을 했겠지. 씨발 이게 무슨 맛이냐고, 장사 접어야 할 맛이라고 속닥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민현 앞에서 박지훈은 더없이 예민해지는 동시에 더없이 무던해졌다. 말이, 감각이, 불평이, 그런 것들이. 평소라면 튀어나왔을 크고 작을 불만들을 저도 모르게 삼켜냈다. 다음엔 제2코스까지 준비하자. 박지훈은 짜장면 얼룩이 튀지 않게 조심하며 국수 가닥을 빨았다. 민현은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젓가락질이 서툴렀다. 툭. 민현의 셔츠 위로 국수 가락이 떨어졌다. 검은색이라 다행이네. 황민현이 혼잣말하며 휴지로 제 티셔츠 자락을 닦아냈다.

 

“이거 먹고 뭐하죠?”

 

퍼석한 탕수육과 들척지근한 짜장 맛을 해결하고 싶어 커피와 자몽에이드부터 테이크아웃했다. 짜장면집에서 커피를 파는 것부터 괴이한 광경이었다. 다행히 커피 맛은 나쁘지 않았다. 형이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빨면서 풍경들을 구경했다. 이리로 가면 벽화 거리도 있고, 저쪽으로 가면 유적 공원도 있다고 하고. 화교 학교도 있대요. 지훈이 찾아낸 정보들을 두런두런 설명했다. 민현은 지훈이 저장해온 사진들을 보다가 나른하게 답했다. 인천이니까, 바다는 못 보려나? 가을 바다 보고 싶은데. 나 일하느라 여름휴가도 못 갔었단 말야아. 투정 부리는 황민현의 말투는 조금 귀여웠다. 맛없는 점심도, 초라한 거리도 다 잊게 만드는 말투였다. 박지훈이 스마트폰을 열었다. 인천과 바다, 끝내주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형. 불가능한 게 어딨어요!

 

없던 바다라도 만들어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날의 박지훈은 그럴 수 있었다.

 

 

 

/

 

 

 

그래서 두 사람은 바다를 보러 갔다. 인천항 연안부두까지 택시를 탔고, 택시비는 박지훈이 계산했다. 짜장면값을 민현이 냈으니 교통비 정도는 자신이 부과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연안부두는 거대한 항구였다.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이 아주 많았다. 중국까지 운행한다는 거대한 여객선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민현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바다에 맞췄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바다를 구경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간식거리를 붙들고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형, 우리도 뭐 좀 먹을까요? 지훈이 민현을 이끌었다. 시장통에서 박지훈은 핫도그를 하나 샀다. 민현은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지훈은 핫도그를 우물거렸다. 아까 먹은 짜장면보다는 조금 더 나은 주전부리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종합어시장을 구경했다. 회무침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황민현이 문득 중얼거렸다.

 

“회무침 먹을 걸 그랬나.”

“아까 짜장면 맛없었죠?”

“너희 집 칼국수가 백배 맛있어.”

 

그래도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 먹고 싶다는 소원 이뤘으니 됐어. 황민현이 기지개를 켜며 물기 많은 시장 바닥을 단정히 밟아나갔다. 물고기들이 퍼덕거렸고 시장은 살아있는 사람들로 생생했다. 민현이 상인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립다.”

“뭐가 그리워요?”

“나, 고향이 부산이거든.”

“아, 부산이요.”

“응. 떠날 때는 바다가 그리운 줄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생각나는 건 바다뿐이네. 황민현이 쓰게 웃었고 지훈은 그 옆모습에서 아주 약간의 황민현을 읽어냈다. 제일노래방에서의 황민현이 아닌, 이십 대 중반 언저리의 황민현이 그곳에 있었다. 제일노래방의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발견하기 어려웠던 민현이 형을 조금 더 알아낸 기분이었다. 맛있는 걸 먹고 싶지만 굳이 줄까지 서진 않는 민현이 형. 바다를 좋아하는 민현이 형. 바다를 볼 때면 눈매가 한껏 진지해지는 민현이 형. 부산에서 온, 민현이 형. 새로 배운 정보들을 복습하며 소년은 뿌듯해졌다.

 

“저녁으론 회무침 먹어요.”

“그럴까?”

 

형이 맛있게 먹는 법 알려줄게. 황민현이 짧게 답했고 두 사람은 다시 시장에서 빠져나왔다. 민현이 공원 벤치에 앉아 바다를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았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지훈의 오른손이 민현의 왼손에 닿을 것도 같았다. 손 틈으로 쏟아지는 구월 오후 볕이 구원처럼 맑았다.

 

바다는 너르고 맑고 깊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짠 비린내가 목 끝까지 번졌다. 박지훈은 생각했다. 이제 다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태풍이 오던 날 감겨오던 혀의 자극도, 형에게 몽정하던 기억도, 다 놓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곁에 앉은 형에게 제대로 고백할 마음이었다. 형을 좋아해요. 당신의 모든 것을 오후 햇볕 아래 이불 빨래하듯 넉넉히 말려보았다고, 나는 이제 나의 사랑 앞에서 더없이 떳떳하노라고. 김영수에게도 황민현에게도 그렇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오늘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오늘의 데이트가 나쁘지 않았기에 다음을 기약해 볼 희망이 충분했다.

 

“지훈아, 박지훈!”

“아.”

 

민현이 형의 목소리에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상상 속 고백에 잠겨, 박지훈은 잠시 현실의 황민현을 잊고 있었다.

 

“지훈아, 왜 이렇게 멍해졌어?”

 

딴생각했어요. 죄송해요, 형. 바다 예쁘네요. 하하. 고백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박지훈이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황민현이 뾰족한 눈초리로 지훈을 살폈다. 데이트 중인데 나한테 집중해야지. 황민현이 타박하듯 박지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지훈이 저도 모르게 ‘헉’하고 소리쳤다.

 

“손잡는 거 싫어?”

“아뇨. 엄청 좋아요…”

“그럼 계속 잡고 있어도 될까?”

“형 마음대로 하세요.”

 

수줍어하는 박지훈을 바라보며 민현도 조금 웃었다. 우리 지훈이는 참 귀여워. ‘우리’ 라는 말에 심장이 뛰었다. 박지훈이 눈꺼풀을 깜빡이며 황민현을 바라보았다. 민현도 시선을 맞추었다. 얽힌 시선은 나른했지만, 어딘가 더없이 건조하기도 했다. 웃음기 없는 표정이었다. 지훈은 어쩐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미 진작에 들킨 마음이었지만, 매일 다시 반복되고 변주되는 감각. 지훈이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민현이 다시 소년의 손을 움켜쥐었다. 잡힌 손에 힘이 실렸다. 지훈아. 우리 지훈이. 박지훈. 잡힌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민현이 세 번, 지훈의 이름을 혀끝으로 튕겼다.

 

“지훈아.”

“네, 형.”

 

황민현이 잠시 말을 멈췄다. 파도가 흘러넘치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소란스럽게 끼어들었다.

 

“너 나 좋아하지?”

“…네?”

 

아냐. 이 말은 좀 비겁하다. 황민현이 목소리를 정돈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너 좋아해.”

“네?”

 

뜻밖의 고백에 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형도 너 좋아한다고.”

 

지훈이 너만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나도 너 좋아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문장이었지만 말끝이 쓰고 건조했다. 고백을 입에 올리는 황민현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지훈이 지금껏 살펴온 민현의 표정 중, 가장 냉랭하고 단호한 얼굴이었다. ‘너를 좋아한다’는 말과 형의 목소리가 매치되지 않아, 박지훈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지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형이,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심사평을 기다리는 오디션 참가자처럼 공손하게 되물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떨려왔다.

 

굽어든 지훈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너를 좋아해. 민현의 손가락이 스타카토 연주하듯 지훈의 등 뒤에서 톡톡 튀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민현의 손가락은 부드럽고 경쾌했다.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 반찬 배달하러 오는 성실한 네 모습도, 우주처럼 예쁜 눈과 깜빡거리는 눈꺼풀도, 백 등 안에 들겠다는 약속을 지켜주는 네 노력도 좋아. 지훈아,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민현이 거기까지 말한 뒤 조금 웃었다. 너는 다정한 애야.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너를 사랑했겠지.

 

“그런 얼굴로 쳐다보면 누구라도 널 좋아했을 거야.”

 

꼭 내가 아니어도 말이야. 황민현이 잡힌 손을 풀어주었다. 박지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홧홧하게 감겨 있던 열기 때문에 주먹 안이 땀으로 흥건했다. 민현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지훈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 지훈이는 멋지고 예쁘고 참 좋아. 황민현은 자꾸만 박지훈을 칭찬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박지훈은 황민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 차가운 말투였다. 무언가를 긁어내는 듯 예리하기만 했다. 핀셋처럼 뾰족한 말투가 자꾸만 마음을 찔러왔다. 황민현은 웃고 있지 않았다. 웃고 있지 않은 민현은 박지훈에게 가장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저도 모르게 지훈이 제 손톱 거스러미를 신경질적으로 훑었다. 오후 네 시의 느긋했던 바다 풍경이 다시 폭풍의 밤으로 되돌아 있었다. 


폭풍우 치는 밤의 황민현이, 제일노래방 일 번 방의 황민현이 거기 있었다.

 

“지훈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 성급하게 정돈된 문장 때문에 지훈의 머리가 얼떨떨했다. 민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단정했다. 이제 제일노래방에 그만 와주면 안 될까? 민현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고 저도 모르게 박지훈은 황민현을 노려보고 말았다. 박지훈의 노여움에도 황민현은 평온했다. 이 말을 위해 오늘을 준비한 사람처럼 뻔뻔한 목소리였다.

 

“왜요?”

 

형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형을 좋아하는데. 열아홉의 박지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민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천역은 지하철 1호선 종착역이었다. 지훈칼국수에서 인천은 아주 멀었고, 박지훈은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헤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착지는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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