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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년] 제일노래방 03

매춘 소재 주의

제11호 태풍 마리아는

올해 들어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관측됩니다.


태풍 마리아는 21일 현재

매우 강한 중형급 태풍으로 발달해

일본 오키나와 서쪽 약 100km 부근 해상에서

시속 29km의 속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다는 것인지 혹은, 

아예 오지 않는다는 것인지.

자꾸만 예보가 바뀌었다.


어림잡아도 열 번이었다. 손띤이었다 암필이었다가, 이름만 바뀐 태풍들이 몇 번이고 예보됐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진짜'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강풍이 찾아올 것이다. 땅이 흔들릴 것이다. 아스팔트 어드메가 부서질 것이다. 노약자는 주의하시고, 기물 파손에 유의하십시오. 외출을 자제하십시오. 그런 이야기들이 시간 단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남쪽 지방에선 이미 거센 강풍이 불고 있습니다. 시설물의 꼭대기가 부서졌습니다. 리포터가 TV 속에서 비닐 우비를 입고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비가 거센 밤이었다.


서울에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일 오후 북상한다고 알려졌던 태풍 마리아가 경로를 바꿔, 오늘 새벽 서울이 태풍 직접 영향권을 들었다는 소식입니다. 시계가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박지훈은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에 눈을 떴다. 투툭. 투둑. 하늘에서 장막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물벼락이 쏟아졌다. 이번에야말로 진짜구나. 박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교복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어머니가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며 가게를 정돈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산을 건넸다. 바람 많이 부니까 조심하고. 궂은 날에는 더 조심해야 해. 엄마는 네가 늘 걱정이다. 박 사장이 부드러운 얼굴로 아들의 등을 쓸어주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부터 험난했다. 2번 마을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했다. 마을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우산이 흔들렸고 물기가 서로에게 툭툭 튀었다. 바짓가랑이가 다 젖었다. 박지훈은 미간을 구겼다. 싫은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은 진흙탕으로 들척거렸고, 아끼는 운동화가 자꾸만 웅덩이에 빠졌다. 겨우 교실 안으로 기어들어서자 동급생들이 우르르 박지훈을 둘러쌌다. 뭐야, 이 새끼들아. 박지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급우들은 표정을 풀지 않고 히죽히죽 웃었다. 지훈이 우산을 정리하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왜. 왜 쪼개는데?


야. 우리가 다 봤어.

 

“뭘?”

 

박지훈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러나 김영수는 분위기를 읽지 못한 듯, 정답게 지훈에게 다가갔다. 김영수가 싱글거리면서 손가락을 또다시 기묘하게 놀렸다. 집게손가락이 푹 하고, 주먹 속으로 꿰어 들어갔다. 저 새끼는 할 줄 아는 제스처가 저것밖에 없나. 박지훈이 지겨운 표정을 했다.

 

“뭘 빼냐.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다.”

 

제일노래방 갈 거면 우리도 데려가든가. 지 혼자만 재미 보고. 의리 없어, 박지훈. 남자애들이 박장대소했다. 박지훈은 순간 아찔해졌다. 서울이라고 해도, 강북 저 끄트머리에 위치한 주택가 위주의 작은 동네였다. 십 대들의 행동반경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비슷했다. 그 골목이 그 골목인 동네였다. 박지훈이 제일노래방을 들락날락하며 반찬 셔틀 행세하는 것을, 누군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이 새끼. 노래방 도우미가 뭐냐고 묻더니.”

 

벌써 붙어먹었어? 그 카운터에 있는 얼굴 허연 형. 이름이 뭐라더라. 황이었나 한이었나. 비슷한 뭐였던 거 같은데. 여하튼 그 형. 씹 뜨니까 좋디? 우리도 소개 좀 해줘라. 거기 원래 미자는 칼 같이 안 받는다고 소문났는데, 어떻게 교복 입고 들락날락하는 거야. 누군가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야, 남자끼리 어떻게 씹을 떠. 똥구멍하고 거시기 밖에 없는데. 박지훈아. 그래서 니가 박혔냐, 박았냐. 나는 내 친구 믿는다. 박았겠지? 온갖 상스러운 소리들이 쥐떼처럼 들끓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지훈이 얼굴을 구겼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래서 좋았냐. 김영수가 자꾸만 깐족거렸다.


“아니라고. 그만해라.”

“야, 박지훈. 얼굴 봐라. 한 대 치겠다?”

“그만하라고 했다.”

“그만 안 하면 어쩔 건데?”

 

그 말을 끝으로, 박지훈이 가방을 집어 던졌다. 두툼한 교과서와 문제집이 그대로 바닥에 수직 낙하했다. 노란색 필통 속에서 빨간 펜이니 검은 샤프니 하는 것들이 튀어나왔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아, 뭐야. 씨발. 박지훈. 왜 가방은 던지고 지랄이냐. 누군가가 떨떠름하게 욕설을 뱉었다.

 

그만하라고 했지. 나 장난칠 기분 아니다. 박지훈이 마지막 경고 조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이란, 불협화음을 매끄럽게 넘기는 재주가 없는 법이다. 도발에는 도발로, 소음에는 소음으로, 겁박(劫迫)에는 그대로 겁박(劫迫)으로. 기울어진 바닥에서 정방향을 잃은 나뭇가지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박지훈이 김영수를 밀쳤다. 주먹을 날린 건 누가 먼저였더라.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흉흉했다. 여자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태풍 마리아는 오전 9시 현재 시속 52km의 속도로 북동진 중입니다. 교실 밖 어디선가 그런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씨발이라든가, 좆같다 라든가, '미친 새끼, 너 진짜 그 남창한테 홀딱 반해냐' 라든가. '남창이라고 하지 마라, 미친놈아. 니가 형에 대해 뭘 안다고' 라든가. 삼류 소설에서 나올 법한 말들이 교실 안을 헤집었다.

 

먼저 뺨을 쳤던 건 누구였더라.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개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의 순서를 모르는 사내애들이 들러붙어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거나 고간을 발로 차려고 아우성을 쳤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들이었다. 머릿속에서 멋지게 내질러진 주먹은, 친구의 팔에 막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반장 애가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교무실로 뛰어갔고, 담임선생님이 나타났다. 야, 새끼들아. 뭐 하는 짓이야.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선생님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기 전까지, 박지훈은 김영수의 팔뚝을 인정사정없이 깨물고 있었다.

 



/

 



정학이라도 먹을 줄 알았는데, 반성문이 전부였다. 박지훈과 김영수는 둘 다 싸움을 못했기 때문에 공평하게 입술이 터졌고, 코피가 좀 났을 뿐이었다. 서로 얼굴에 멍은 들었지만 특별히 크게 다친 부분도 없었다. 다만 김영수의 팔뚝에는 앞니 자국이 선명했다. 박지훈은 선생님 앞이라 차마 크게 웃을 수는 없었지만,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이겼다. 김영수.

 

두 사람은 방과 후에 남아, 함께 반성문을 썼다. 담임이 말했다. 인과관계가 다르게 적혀 있으면, 다시 쓰는 거다. 장난 아닌 거 알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남창이니 뭐니 했던 건 너나 나나 불리하지 않겠냐. 김영수가 그렇게 말했고, 박지훈이 동의했다. 제일노래방 이름이 엄마 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불 보듯 뻔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글을 끼적였다. 뭐가 문제라고 할까. 니가 내 운동화에 진흙을 묻혀서 싸웠다고 하자. 미취학 아동 같은 이유였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운동화에 대한 호소문으로 빈 종이를 채웠다. 아이씨. 아파. 너 존나 세게 깨문 거 아냐? 반성문을 쓰다 말고 김영수가 아픔을 호소했다. 그의 팔에는, 지훈의 앞니 자국이 토끼처럼 선명했다. 박지훈은 김영수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깨물어서 미안하다. 아프냐? 김영수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했지만,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개싸움을 벌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단짝이었다.

 

“미안하다.”

 

김영수가 반성문을 쓰다 말고 갑작스럽게 사과했다.

 

“뭐냐.”

“그냥.”


니가 그 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구라까지 마. 속일 걸 속여.”

 

몇 년 친구인데.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이번에는 김영수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근데 지훈아. 그 형 소문 안 좋은 건 사실이야.”

 

출신도 모르고, 가족도 없대. 어른들도 별로 안 좋아하셔. 김영수 소식통에 따르면, 황민현은 동네 어른들에게 환영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그... 제일노래방. 그 사장님하고 이상한 관계라고. 엄마가.. 그 형... 그.. 첩 같은 거라고...... 그런 거 전문으로 하며 먹고 사는 사람 같다고. 그랬거든 나한테. 거기까지 말한 뒤 김영수가 박지훈의 눈치를 살폈다.

 

“알아.”

“뭘 알아?”

“그 형이... 노래방 사장님하고 그런 관계인 거 안다고.”

 

모를 리가 없었다. 첫 만남부터, 노래방 사장님과 얽혀 있다가 카운터로 튀어나온 황민현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민현의 곁을 맴돌다 보니 자연스레 깨닫게 됐다. 황민현이 노래방에서 먹고 자는 대신 무엇을 내어주고 있는지를.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던 감각이 다시금 스며들었다. 질투였다. 그러나 박지훈은 황민현을 말릴 재간이 없었다. 황민현과 박지훈 사이를 정의내릴 단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한 형·동생 사이라고 하기엔 양심 없고, 한 번 빨아준 사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삭막하고, 단골손님이라고 하기에 박지훈은 돈이 없었다. 박지훈의 일방적인 짝사랑과, 매번 짝사랑을 에둘러 거절하는 형. 어쩌면 정말로, 맛있는 반찬을 공수해오는 반찬 셔틀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 단어까지 도달하고 나니 박지훈은 슬퍼졌다.

 

나는 너가,

그 형이랑 안 어울렸으면 좋겠는데.

 

김영수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의 걱정이 느껴져 박지훈은 제법 코끝이 알싸해졌다. 이 새끼. 의외로 감성충이네. 박지훈은 다정한 마음이 고마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수를 깨문 것은 정말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김영수를 깨물지 않겠습니다.] 박지훈은 그 문장에 힘을 주고 눌러 적었다. 반성문의 모든 내용이 거짓이었지만, 그 문장만큼은 나름대로 진심을 담았다.

 

내 말 제대로 들은 거지? 김영수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박지훈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일노래방. 조심할게.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반성문을 수십 장 적어도 이미 되돌릴 순 없었다. 친구의 안타까운 부탁도,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자꾸만 형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잊어버린 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들척거리며 달라붙던 혀의 감각보다, 어묵볶음이 맛있다며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던 형의 얼굴이 더 많이 떠올랐다. 짜장면을 먹이고 싶고 족발을 먹이고 싶고 여자애들이 그렇게 좋다고 말하던 마카롱을 사다 먹이고 싶었다. 서투른 젓가락질과 제일노래방 벽지처럼 엉망이었던 꽃무늬 셔츠. 제11호 태풍 마리아는 올해 들어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관측됩니다. 

 

어떤 연유든,

어떤 계기든,

어떤 형태든,


첫사랑이었다.

 

 

 

/

 

 


반성문을 쓰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이면 벌써 형도 밥을 먹었겠지. 아직도 거리에는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해야 할 일을 빼먹고 싶진 않았다. 숙제하는 듯한 경건한 마음으로 박지훈은 도시락을 쌌다. 그냥 얼굴만 보고, 이것만 전해주고 오자.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박지훈이 제일노래방으로 들어섰을 때, 지훈은 뭔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불이 모두 꺼져있었고, 노랫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평소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던 누나들도 보이지 않았다. 형. 형, 있어요? 지훈이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지훈아... 나 여기 있어.”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민현이었다. 


“형. 거기서 뭐 해요?”

“나? 그냥 앉아 있어.”

“왜 그냥 앉아 있어요. 이렇게 깜깜한데.”


달빛도 빗소리에 가려진 밤이었다. 불을 켜고 싶었지만 황민현이 만류했다. 그냥 둬. 깜깜하게 있을래. 자다 깬 듯한 목소리였다. 형, 오늘은 영업 안 했어요? 그 말에 황민현이 조용히 답했다. 일이 좀 있었어. 진상 손님들이 와서, 저녁에 난리가 났거든. 


“너 안 와서 다행이었어.”


지긋지긋하다. 매번 이래. 황민현은 피로해 보였다. 눈가 아래가 수척했다.


“형. 오늘 힘들었어요?”

“먹고 사는 게 다 힘들지, 뭐.”


그러니까 지훈이는 열심히 공부해. 이런 데 자꾸 찾아오지 말고. 황민현이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박지훈은 형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민현이 방금까지 누워있었던 듯, 소파에서도 온기가 느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했지만, 박지훈은 사실 가슴이 쿵쿵 뛰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 소리가 형에게 들리면 어떻게 하지. 박지훈은 몰래 심호흡을 하면서 태연한 척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예쁘고 착한 지훈이.”

“안 예뻐요.”

“왜? 지훈이 눈이 얼마나 예쁜데.”


형이 더 예뻐요. 원래는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황민현이 박지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기 때문이다. 형의 동그란 머리통이, 오른쪽 어깨에서 그대로 전해져왔다. 사람이 너무 심하게 두근거리면, 심장이 폭발해버릴 수도 있을까? 심장이 폭발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형이 다치면 어떻게 하지.


지훈아, 

나는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고요한 목소리였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 나이만 먹었지. 그러니까 우리 지훈이는 공부 열심히 해. 박지훈은 황민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해요. 속상하게.”

“속상해?”

“당연히 속상하죠.”


자꾸 오지 말라고 하고. 잊어버리라고 하고. 형,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잖아요. 내가 왜 자꾸 여기 오는지 형은 알잖아요. 왜 자꾸 여기 와서 밥 같이 먹으려고 하는지 형은 다 알잖아요. 모른 척하는 거,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은데. 자꾸 모른 척하면서 그런 말까지 하면. 내가, 속, 상하잖아요. 


“지훈아.”

“네.”


떨려오는 박지훈의 목소리를 황민현이 잘라냈다.


“이제 그만 가. 늦었다.”

 

민현이 지훈의 어깨에서 머리를 일으켰다. 어깨가 더웠다. 이대로 영영 시간이 멈춰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았던 시간은 늘 짧게 끝나는 법이다. 황민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기다란 그림자가 지훈의 위로 드리워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황민현의 그림자를 쫓았다. 형. 좋아해요. 좋아한다고요. 말하고 싶었다. 단숨에 토해내고 싶었다. 이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이 무엇인지,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토해내며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황민현의 눈동자가 앞서 대답하고 있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침묵의 신호였다.


박지훈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어렵기만 한지. 지금껏 세상에 크게 어려운 일이 없다고 믿어왔는데. 왜 자꾸만 황민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뭉개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멋있는 고백을 하고 싶었는데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형. 차라리 수학 문제를 풀 테니까, 차라리 공부를 할 테니까, 이제 좀 정답을 알려주면 안 돼요? 지훈은 민현의 셔츠 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제 바지춤만 쥐어 잡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허벅지를 적셨다. 


왜 울어. 


이번에는 민현이 당황할 차례였다.


왜 울어. 울지 마. 지훈아.

형은... 형은 진짜 다 알면서.


지훈이 교복 와이셔츠로 얼굴을 닦았다. 얼굴 상하겠다. 나 손수건 있어. 황민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훈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박지훈은 고개를 내리깐 채 형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지훈아. 다정한 목소리. 늘 다정하기만 한 목소리. 지훈은 이제 그 목소리가 조금 싫어졌다. 지훈아, 형 좀 봐봐. 아예 안 볼 거야? 황민현이 지훈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데이트하자.”

“거짓말. 데이트라고 해놓고 또 제일노래방 2번 방에서 60분 코스로 노래나 시킬 거죠?”


그래놓고. 나한테 랩도 하고 노래도 하라고 할 거잖아요. 형은 랩도 못하면서... 박지훈이 어쩐지 서러워져 이제는 콧물까지 훌쩍이며 엉엉 울었다.


“아니, 정말로 데이트하자.”


너 이번에 중간고사 100등 안에 들면 데이트하자.

성적표 가지고 나한테 제일 먼저 와.

요즘 열심히 했잖아.

 

제일노래방이 아닌,

어디로든 가자. 

지훈아.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이번에는,

황민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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