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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황] 다섯 번째 안드로이드

* 사망 소재 주의


D0501

목소리 들리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을 뜨니, 거뭇한 천장이 눈에 띄었다. 코끝에 맴도는 물곰팡이의 서걱한 냄새. 연구소 천장과 벽은, 약품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늘 깨끗했는데. D0501은 우리가 완벽히 다른 공간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D0501, 코드명 [배진영].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박사님. [배진영]이 단정히 대답했다. 우선 구동 상태부터 체크해볼게. 박사님이라 불린 황민현이 익숙한 손짓으로 배진영의 신체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관절 부위도 멀쩡하고, 시신경에도 문제없는 것 같고. 입 좀 벌려볼래? 금속 소재의 검사 기구가 혀 위쪽을 건드렸다.

 

황 박사님이 탈출에 성공했구나. 배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폭음 속에서 무사히 도망쳤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전투용 안드로이드로 개발된 [배진영]은 연구소에서 서브 역할을 맡고 있었다. 메인 로봇이 망가졌을 때를 대비한, 마지막 예비 개체. 덕분에 [배진영]은 연구소에서 늘 가수면 상태로 보관됐다. 황민현 박사가 찾아올 때에만, 배진영은 잠에서 깨 또렷한 정신을 유지했다. 연구소 총 책임자였던 황 박사는 배진영에게 늘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배진영에게, 꿈과 현실을 잇는 유일한 접점과도 같았다.

 

“기억 조작 여부도 체크해보자. 진영아. 나 기억해?”

“네, 황민현 박사님이시잖아요.”

“그래. 기억나는 걸 좀 얘기해볼래.”

 

뭐든 좋으니까. 그 말에 진영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는 안드로이드 로봇이고, 예비 개체고, 전투형으로 개발됐고. 선생님은 황민현 박사님이고, 북반구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시는 분이고, 연구소 총 책임자시고. 연구소에서는 로봇이 많았고, 늘 깨끗한 냄새가 났어요. 아, 박사님은 잘생기셨고, 자몽에이드를 좋아하세요.

 

“그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구나.”

 

황 박사는 진영의 상태를 냉정하게 정리했다.

 

“그런 건가요?”

“그런 거란다.”

“...박사님은 커피를 안 드셔요.”

“진영아. 우린 이제 커피고 자몽에이드고 마시지 못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물이나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황민현 박사는 덤덤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연구소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모든 게 파괴됐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나와 너, 딱 둘 뿐이야. 메인 안드로이드도, 개발 자료도, 남아있던 연구원들도 모두 깨끗하게 소멸됐단다. 황 박사는 덤덤하게 비극을 설명했다. 배진영이 박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황 박사는 울지 않았다. 너랑 나는 연구소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에 쫓기는 신세고, 비밀 대피소로 도망치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지금 시국이 시국인 지라, 많이 불안정하거든. 진영이도 늘 도망칠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황민현 박사가 리모컨 버튼을 눌러 뉴스 채널을 보여주었다. 남반구 군대의 잇따른 습격과, 북반구 황족의 처형 예고. 사막화가 90% 이상 진행된 지구별은, 북반구와 남반구로 나눠져 오랜 전쟁 상태였다. 전쟁이라고 해도, 로봇과 로봇 사이의 지루한 전투가 이어졌다. 전쟁 승패가 안드로이드 기술 연구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황민현 박사는 남반구에서도 북반구에서도 주목받는 존재였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인물의 비극이었다.

 

생명의 위협은 여러 번 받아봤지만, 이번에는 정말 끝일 줄 알았어. 황 박사는 한숨을 토로하며 배진영의 곁에 주저앉았다. 고마워, 진영아. 네가 날 구해준 건데, 진영이는 기억이 안 나지? 황 박사가 진영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배진영은 정말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황 박사를 바라봤다. 네가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싸워줬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대피소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거고. 그때 너무 큰 부상을 입어서, 네 기억 중추와 생명 유지 장치 등에 문제가 생겼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천재니까.”

 

아주 잘 고쳤다고, 기억은 좀 날아갔지만. 황 박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진영을 주물거렸다. 진영아. 좀 움직여봐. 일어나서 걸어보고, 돌아보고, 춤도 춰보고, 노래도 불러봐. 진영은 ‘춤을 추는 것과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투 안드로이드 구동 체크와 무슨 상관인지 궁금했지만, 안드로이드답게 묵묵히 황 박사의 명을 따랐다. 일어나서 걸어도 보고, 빙그르르 돌아도 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민현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나는 정말 천재인가 봐. 전투 안드로이드인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

 

“아, 그런데 진영아. 지금부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

 

너는 이제 나랑 똑같이 밥을 먹고, 나랑 똑같은 시간에 잠을 자야 해. 설명하기 어려운데, 여러 가지 코드가 꼬이면서 네 전원 시스템이 망가졌어. 전원을 꺼서 충전하는 방식으로는, 신체 유지가 어려워졌단다. 어려울 것 없어. 인간과 똑같이 밥을 먹어 영양 보충을 하고, 잠을 자서 피로를 회복하면 돼. 그러면 아무 문제 없단다.

 

“무리하면 그대로 쓰러지는 거니까, 몸 관리를 소중히 해주렴.”

 

황민현이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고, 배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 값으로 도망친 거니까, 우리는 꼭 살아남아야 해.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황민현은 울지 않았다. 그래서 배진영 역시, 울지 않았다. 애초에 안드로이드 로봇에게는 우는 기능이 소거돼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박사님.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황 박사는 대피소에서도 내내 바빴다. 노트북을 두드리면서 배진영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코드들을 매만졌다. 전투용 안드로이드는, 전투 개체로서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학습 지능이나 가사 지능을 낮춰둔 측면이 있었다. 내내 숨어있으니, 황 박사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벌일 일도 없고. 배진영은 박사를 돕고 싶어 이런저런 가사일에 도전해봤지만, 황민현은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바닥이 너저분해지거나 갓 빤 빨래에서 냄새가 나면,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상황에서 더 화가 날 것 같다는 이유였다.

 

결국 배진영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고양이와 같은 나날을 보냈다. 가사일을 황 박사가 담당해버렸기 때문에, 배진영은 종종 정원에 나가서 꽃에 물을 주거나 감자를 캐왔다. 눈을 뜨면 황민현과 함께 밥을 먹었고(둘 다 요리를 못했기 때문에, 점토 형태의 비상식량을 먹었다), 온종일 TV를 봤다. TV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충돌 사태에 대해 연일 자세히 보도했다. 북반구의 황족이 인질로 잡혔고, 그나마 친족 몇 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보도였다. 당시 황궁에 없던 황태자는 다행히 인질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여태껏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앵커의 얼굴이 착잡했다.

 

북반구 황족의 궤멸은 곧, 북반구의 궤멸을 상징했다. 배진영은 앵커의 심각한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연신 하품을 했다. 사실 북반구니 남반구니 하는 개념은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안드로이드인 배진영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뿐이었다. 북반구가 멸망한다면, 황 박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북반구 정치 체계가 붕괴한다고 해도, 황 박사가 남반구에서 중요 보직을 맡을 수 있다면 세계 전쟁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안드로이드에게 ‘주인’은 모든 것이었다. 배진영은 황민현만 보호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배진영은 세계 전쟁의 승패 가능성보다도, 황 박사의 외출이 가장 신경 쓰였다. 황 박사는 오후 내내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밤이 되면 어딘가로 외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돌아올 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거나, 나뭇잎 따위가 옷 진창에 묻어있곤 했다. 배진영은 황 박사에게 몇 번이나 간곡하게 부탁했다. 박사님, 꼭 나가셔야 하나요? 저는 박사님이 걱정돼요. 그러나 그때마다 황민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진영을 노려보았다. ‘너는 모르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였다. 진영은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기억을 잃은 그는 황민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백업된 기억만큼이나, 인간 수준으로 퇴화된 신체 기능 또한 그러했다.

 

“너, 몸 상태가 제대로 안 돌아왔잖아.”

 

지금 네 내구성은 나랑 별 다를 바가 없어. 인간하고 똑같은 전투용 안드로이드를 데려가서, 뭐에 쓰라고. 위급 상황에서 발목이라도 안 잡으면 다행이게.

 

“그래도 박사님보다는 나을걸요.”

 

진영이 조금 부끄럽다는 듯, 조금 불쾌하다는 듯 민현의 말에 반박했다. 그 말에 황민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훤칠한 키와 적절한 체격을 가진 황민현 박사님은, 앞마당에서도 자주 넘어질 만큼 운동신경이 좋지 않았다. 한번은 배진영이 들고 있던 고무호스에 발을 걸려, 그대로 진흙탕에 엎어진 적도 있었다. 피를 볼 정도의 상처가 난 적은 없었지만, 피부가 살짝 긁히는 정도의 찰과상은 빈번했다. 그러니까, 저를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 도움이 될 수 있게 노력할게요. 진영이 간청하자, 민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영아, 네가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지금 너에게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명령하는 거야. 민현이 진영의 손바닥을 거칠게 쥐고, 손가락으로 지구어를 적어내렸다. ‘밤에 외출하는 황민현을 따라가지 말 것. 따라가려는 시도조차 떠올리지 말 것.’ 진영아, 너는 지금 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어. 같이 암호를 읽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 지키기 위해 전투 상황을 대비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이번에 네 기체가 손상되면, 나는 더 이상 널 고쳐줄 수 없어. 그대로 폐기처분이야. 황민현의 말이 맞았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망가진 개체는, 재손상을 입을 경우 90% 이상이 폐기처분됐다. 주요 기능이 두 번 다시 제 동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영아.

너는 네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

 

그 말까지 들었을 때, 진영은 약간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참담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가슴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 답답했다. 이것이 ‘참담하다’는 감정이겠거니, 진영은 사전의 정의를 되새겼다.

 

“속상해하지 말고.”

“속상해하지 않아요.”

 

진영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황 박사가 나른하게 진영을 달랬다. 진영아, 울어? 뼈아픈 농담이었다. 진영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배진영]을 만든 황민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안드로이드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가사용 안드로이드, 전투용 안드로이드, 산업용 안드로이드. 가사용 안드로이드는 일상생활에서 가사노동을 대신하며,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가사용 안드로이드의 경우, 안드로이드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전투용 안드로이드는 지뢰 제거 등을 전문으로 하는 동물형 로봇을 비롯해,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인간형 안드로이드까지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산업용 안드로이드의 경우, 의료·제조업 등을 비롯해 연구 분야까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안드로이드의 역사> p132

 

‘너는 내게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네 신체 상태나 잘 신경 쓰도록 해.’ 황민현에게 거절당한 이후, 배진영은 점점 더 할일이 없어졌다. 몸을 정비하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대피소 내 서재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안드로이드의 역사’를 읽는 배진영을 보더니, 황 박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안드로이드라면 다 기본적으로 탑재된 내용인데. 우리 진영이는 정말, 완벽하게 망가져 버렸구나.’ 배진영은 제 주인의 비난을 무어라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했다. 배진영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민현은 또다시 입을 열어 밉살스러운 소리를 덧붙였다. ‘그런 진영이을 이렇게 멀끔하게 재생산하다니, 황민현은 정말 천재가 아닐 수 없어.’ 배진영은 그런 말들에는 ‘네’라고 순순히 답해주었다.

 

배진영은 황민현에게 지나치게 약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연구소 소속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연구소 소장은 황 박사님. 배진영은 연구소 소유의 기물. 그러니, 배진영은 황 박사의 소유품이라고 해석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누구나, 자신의 주인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법이다. 그것이 설사, 만들어져 주입된 감정임에도 그러했다.

 

진영은 황민현의 외출이 늘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야 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같았다. 결국 진영은, 밤을 지새우기로 결정했다. 황 박사가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리면, 배진영은 책과 이불을 꺼내 들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그림자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때로는, 책에서 읽은 [기도]라는 것을 해보기도 했다. 박사님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소원을 말로 언급하면,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 황민현이 문 앞에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진영은 얼른 달려나가 문고리를 열었다. 박사님, 고생하셨어요. 황민현은 배진영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 잔소리를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저 괜찮아요. 박사님. 저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잠을 안 자도, 괜찮은 것 같아서.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아니 그냥 책이 좀 더 읽고 싶어서. 저가요. 박사님을 기다린 게 아니라. 고장 난 기계처럼 배진영이 변명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 박사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 박사는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고, 코트를 정리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이내 진영의 등에 자신의 몸을 잠시 기댔다. 그래, 다녀왔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끓여줄래?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은 조용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과 달리, 대피소는 평온했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전쟁이 격해지고 있다는 뉴스만 아니면, 배진영은 지금 자신이 휴가 중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황 박사와 처음으로, 연구소 밖으로 휴가를 떠난 것이다. 길고 지루했던 가수면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온전하고 또렷하게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감자를 캘 때 느껴지는 흙의 감촉, 물이 흩어지는 감각들, 그리고 그 앞에서 조용히 미소짓는 황민현. 어쩌면 그것이 ‘행복’과 비슷한 감각일 지도 모른다고 배진영은 생각했다. 그러나 배진영은 황 박사에게는 절대 그 감정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종종 황 박사는 얼굴을 찌푸렸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표정이 하얗게 질려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목숨값이 남아있는 거야. 차를 삼키던 순간에도, 황민현은 배진영에게 그런 말을 했다. 기억해 진영아. 너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값 위에 살아있는 거야. 너는 정말로, 이걸 잊으면 안 돼.

 

황민현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지만 울지 않았다. ‘울고 싶으면 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눈물에는 치유 효과가 있대요’ 진영이 조심스럽게 제안하면, 황민현은 네가 뭘 안다는 표정으로 진영을 노려보았다. 다만, 어떤 밤에는 황민현이 배진영의 침실을 찾았다. 같이 자자. 황 박사는 진영의 침대로 기어들어와, 애착 인형처럼 진영을 끌어안았다. 배진영은 황 박사가 푹 잠을 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밤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든 사람 특유의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밤은 깊고, 깨어있는 사람은 둘. 진영은 손을 뻗어, 황민현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었다. 때론 진영은, 그 마른 뺨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

 

 

 

“진영아.”

 

폭음 소리와 함께, 황 박사가 진영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노트북과 몇 가지 비상식량을 챙긴 단출한 가방이 눈에 띄었다. 배진영은 바로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민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기 때문이다. 진영은 옷걸이에 걸려있던 전투복을 집어, 몸에 욱여넣듯 갈아입었다. 멀리서 폭음과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전투 가능한 개체가 몇이지? 차라리 연구원 쪽이면 낫겠는데. 몸은 풀렸을까. 일대다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까. 진영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황 박사만은 지켜야 했다.

 

“너 또 허튼 생각 하지?”

 

황 박사는 진영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잘 들어, 도망치는 것만 우선으로 할 거야. 황민현이 침대 부근 어딘가를 매만지더니, 버튼을 찾아냈다. 민현이 발을 굴러 버튼을 세게 누르자, 기둥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이 침대부터 들어봐. 진영이 침대를 들자, 비상 통로가 등장했다. 진영이 바닥 문을 들어 올리고 민현이 구멍 속으로 먼저 들어섰다. 얼른 들어 와. 진영이 엉거주춤 구멍 안으로 내려가자,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암전(暗轉).

거대한 장치가 구동되는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진영아, 기억해 둬.”

 

진영의 손을 잡고 황민현은 자꾸만 걸었다. 이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되어있는지 진영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 차올랐다. 나는 정말로, 박사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너는 지금 나를 지킬 수 없어.”

“네, 박사님.”

“서운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현실이 그래.”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걸었다. 녹진한 공기 속에서 호흡이 답답했다. 진영은 괜찮았지만, 황 박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숨이 달려 헉헉거리고 있었다. 박사님, 업어드릴게요. 진영이 자세를 낮춰 등을 내어주었다. 민현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번에는 진영이 고집을 부릴 차례였다. 지켜드리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박사님이 없으면, 저는 방향도 못 찾아요. 쫓아오기 전에 달아나야 하는 거잖아요. 업히세요. 황 박사는 조금 생각에 잠기더니, 진영의 등에 몸을 뉘었다.

 

진영이 민현을 업고 조금 더 걸어가니, 어슴푸레 빛이 느껴졌다. 푸른빛이 감도는 공간 속에 들어서자, 동굴 같은 형태의 공간이 보였다. 작은 방과 같은 형태였다. 약간의 식량과, 몇 권의 설명책자와, 몇 개의 비상 의료 도구와 작은 박스 몇 개.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대피소와는 딴판인 공간이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한, 작디작은 공간.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진영아.”

“네.”

“마지막 명령을 내릴게.”

 

솔직히 말할게. 어차피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야. 이리 와서 잘 봐봐. 어릴 때부터 너는, 남들보다 구조 같은 건 잘 외우곤 했잖아. 너한테 특화된 시스템이야. 민현이 진영의 손을 당겨, 낮은 위치에 놓인 선택 판들을 보여주었다. 이걸 이쪽으로 돌리고, 검은색 선을 하얀 쪽에 꿰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버튼을 두 번 누른 뒤, 하얀 버튼을 눌러. 복잡하긴 하지만, 무조건 외워. 네 학습 능력이 낮게 세팅되어 있단 건 거짓말이야.

 

“박사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 세팅이 또 뭔가 잘못되어있다는 건가요? 진영의 얼빠진 반응에, 민현이 얼굴을 구겼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차피 네 지문으로 작동되는 구조니까, 네가 외워야 의미가 있어. 얼른 외워. 안 그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나 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얼른. 황민현은 자꾸만 배진영을 윽박질렀다. 진영은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어쨌거나 황민현이 하라는 대로 순서를 외웠다. 박사님이 하라니까, 박사님이 하란 대로 하지 않으면 저도 죽고 박사님도 죽는다니까. 그저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 판의 위치와 순서를 외웠다. 이 기구를 이쪽으로, 검은색 선을 하얀 쪽으로, 붉은 버튼을 두 번 누른 뒤 하얀 버튼을. 민현의 윽박지름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 순서를 외우는 것은 수월했다. 진영이 순서를 완벽히 습득하자, 황민현이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일단 네가 이거 들고 있어.”

 

황민현이 배진영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가방 앞쪽에 붉은 주머니가 있는데, 밖에 나가자마자 그걸 보여주면 돼. 거기에 ‘사자(使者)’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엄청 어두컴컴할 테고, 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간은 나도 몰라. 죽고 싶을 만큼 무섭겠지만 어떻게든 버텨.

 

“박사님은요?”

“당연히 나도 가지. 그런데 네가 먼저 타야 해.”

“왜요?”

“그렇게 시스템이 되어 있다니까.”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동굴 전반이 무너지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였다. 박사님이 소리쳤다. 셋을 세면, 바로 시작해. 배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 이, 일. 진영은 바로 선택판에 달려들었다. 올바른 순서를 지키자 곧바로 숨겨진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형태의 작은 구가 보였다. 진영이 구 안으로 들어섰고, 민현이 진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영아.”

“얼른요. 늦겠어요.”

 

진영이 초조한 듯 황 박사의 손을 당겼다. 굉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늘 목숨값을 기억해야 해.”

 

진영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진영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왜 문이 닫혔지? 아직 박사님이 타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 밖 황 박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민현의 눈동자는 평안했다. 안녕. 그가 입술을 열어, 짧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문을 닫은 것은 민현의 손이었다. 박사님. 박사님. 박사님. 왜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왜 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거죠? 박사님. 박사님. 황민현 박사님. 황민현! 배진영이 울부짖었다. 손톱을 세워 유리 벽을 긁었으나, 특수 소재로 이뤄진 내벽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배진영의 울부짖음보다 더 크게 굉음 소리가 들려왔고, 모든 것이 또 다시

 

암전(暗轉).

 

/

 

 

황 박사의 말처럼 엘리베이터는 두 시간 넘게 어둠 속을 헤맸다. 그 사이 배진영은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대체, 왜? 박사님, 대체 왜? 지켜져야 할 대상이 뒤바뀌었다. 자신이 해석할 수 없는 오류가, 너무나 거대한 무게로 배진영을 짓눌러왔다. 왜 황민현은 자신을 이 공간에 몰아넣었는가. 지옥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이곳이고, 황민현이 있던 공간이 안전했던 걸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마주친 황민현의 눈빛은 지독하게 평온했다. 배진영은 문득, 그 눈빛이 몹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디에서 그 눈빛을 봤지? 자신의 땀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동했다. 내가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던가? 문득 배진영은, ‘안드로이드의 역사’ 41p를 떠올렸다.

 

[전투형 안드로이드 로봇은 땀이 흐르지 않는다. 땀 때문에 전투 효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배제된 땀샘은, 전투형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구분을 가능하게 한다.]

 

진영아 우리는.

목숨값을.

너는 우리의 목숨값을 늘.

기억해야 해.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누가 그런 표정을 지었지?

그것은 황민현이었던가.

그렇다면 황민현은 왜 거기에서,

또 여기로.

 

진영은 깨질 듯한 두통에 머리가 아팠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쉬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배진영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줄줄 흘러나오는 눈물이 뜨거웠다. 배진영의 머릿속에서 황 박사의 목소리를 닮은 누군가가 외쳤다. 진영아, 너는 울 수 없어. 너는 안드로이드잖아.

 

그렇다면, 이 눈물은 뭐야?

박사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또다시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암전(暗轉).

 

 

 

/

 

 

 

진영이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였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 위에 물수건을 올려준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길이 익숙했다. 일어나 봐, 진영아.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진영은 눈을 뜨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뭐, 뭐든 좀 줘 봐요. 욱. 누군가가 그릇을 건네줬고, 배진영은 거기에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냈다.

 

“박사님.”

 

배진영의 앞에는 황민현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초리, 모든 것이 헤어질 때와 똑같았다. 배진영은 안도했다. 아, 황 박사님이 무사히 탈출했구나. 배진영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러나 배진영은 동시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황민현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고, 진영을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박사님, 저는 정말 박사님이랑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그만 좀 해.”

 

나는 이 짓이 벌써 다섯 번째니까.

황민현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눈치를 채지 그러니? 너 그렇게 둔한 성격 아니었잖아.”

 

심지어 어릴 때는, 황민현만큼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서 왜 이렇게 어벙하게 굴어? D0501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애 새끼 하나한테 미쳐가지고. 아, 황민현 진짜 존나 싫어. 배진영 존나 싫어. 둘 다 정말 싫어. 황민현의 모습을 땄지만, 결코 황민현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신경질적으로 가방 앞주머니를 뒤져 증표를 건네줬다. 니 눈으로 확인해, 증표.

 

“이게 뭔데요?”

“아, 시발. 또 답답하게 구네.”

 

나는 네 번째처럼 친절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 덕에 [나]는 정말 몇 번을 더 죽어야 하는 거야. 황 박사가 앓는 소리를 했다. 갑작스럽게 그가 흰 가운 앞주머니에서 메스를 꺼내, 자신의 손목을 죽 그었다. 진영이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길고 예리한 상처가 황민현의 팔 위에 드러났다. 황 박사는 제 손에 그었던 메스를 들이대, 진영의 손등 부근도 함께 긁었다. 붉은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피가 맺히는 안드로이드는 없어.”

 

대부분 이런 꼴이지. 민현은 자신의 상처를 벌려, 금속과 선들이 가득한 내부를 보여주었다. 피가 흘러야 할 곳에서는, 전선 몇 가닥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너 안드로이드 아니야.”

“...네?”

“너 안드로이드 로봇 아니라고.”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야.

 

“저는 정말, 뭐가 뭔지.”

“황민현은 죽었어.”

 

오리지널 원전은 연구소 폭발과 같이 날아갔다고. 아무리 황민현이 천재여도, 몸 반쪽이 날아갔는데 살아남는 사람이 어디 있어? H0809_5. 이게 내 이름이야. 네가 직전에 헤어졌던 애가 네 번째, 내가 다섯 번째. 황민현은 자신의 사망을 대비해서, 대피소 주변에 몇 명의 클론들을 배치해뒀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야. 널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세팅돼 있고, 그래서 나는 존나 열받지만... 어쨌거나 너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어.

 

“저를... 왜요?”

 

황민현이 한숨을 내뱉었다. 눈이 있으면 네가 직접 읽어. 이제 그만 애새끼처럼 굴라고. 민현은 신경질을 내면서 증표를 건네주었다.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북반구의 황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정한 증표가 있고, 그 증표를 가진 사람이 ‘왕위계승자’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왜긴 왜야? 네가 황태자잖아.”

 

행방불명된 황태자가, 바로 너라고. 북반구의 유일한 황위계승자, 지금 남북전쟁의 판도를 바꿀 유일한 사람이 너라고.


“그리고 황민현은 네 약혼자였고.”


너는 아마, 기억도 못 하겠지만. 황민현의 얼굴을 한 다섯 번째 클론이 쓰게 웃었다. 


 

 

 

-




뒤를 더 이어야 할 거 같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만약 뒤를 잇게 되면 그때는 외전 격으로 가져올게요. 포타로도 트위터 쪽으로도, 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힐링받고 있어여... ㅠ0ㅠ 



 

 

워너원 덕질하는 해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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